The Trade: 무역왕 김스타 10화

전시회 참가, 그리고 굴욕(하)

by 이설아빠

전시회 둘째 날 아침, 도현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전시장으로 향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전날의 실수들이 머리카락에 엉긴 먼지처럼 끈적하게 남아 있었다. 아무리 털어내려 해도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도현은 숙소에서 나오는 길에 보이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퀭한 눈 밑, 푸석한 얼굴. 첫날의 참담한 기억이 얼굴에 새겨진 듯했다.

“오늘은... 잘할 수 있겠지? 한 선생님, 제발 빨리 돌아와 주세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속은 여전히 무거웠다. 전시장에 도착하자 어제와 똑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화려한 대기업과 유명 브랜드의 부스들, 북적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냥 지나쳐가는 바이어들. 화려하나 부스들 사이에서 유독 초라해 보이는 뷰티스타 코스메틱의 부스. 도현은 부스 안에서 물건들을 정리하며 효진에게 말했다.

“오늘은 설명도 조금 더 간결하게, 표정도 밝게 가봅시다. 그리고 어제처럼 카탈로그만 주지 말고, 무조건 제품을 직접 손에 쥐어드리자고요.”

효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오늘은 뭔가 느낌이 다르세요. 그리고 이거 한 번 보세요."”

효진이 밤새 만든 ‘홍보 영상’을 노트북에 담아왔다. PPT와 제품 이미지를 엮어서 만든 짧은 영상이었지만, 제품 특징을 시각적으로 잘 정리하였고, 카탈로그보다 훨씬 직관적이었다. 도현은 영상이 재생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제품의 주요 기능, 타깃 소비자, 디자인 철학이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지막에는 ‘MADE IN KOREA, FOR URBAN MEN’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단순했지만 강렬했다.

"효진 씨, 이거 정말 잘 만들었네요. 직접 만드신 거예요?"

"어제 대표님 힘들어하시는 거 보고, 저라도 그냥 뭔가 해야 할 것 같았어요."

"효진 씨, 홍보 영상 제작하는 회사 창업해도 잘하겠는데요?"

"하하하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대표님."

효진이 급하게 준비한 홍보 영상이 부스 진열장 위에 설치된 노트북 화면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몇몇 바이어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잠깐이었지만 영상을 감상하기 시작하였다.

“이 영상, 직접 만든 거예요? 영상에 나오는 이 제품은 뭐예요?”

한 일본계 유통회사 담당자가 물었다.

“네. 브랜드 자체 제작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제품은 천연 성분 중심이고, 데일리로 쓰기에 부담 없는 포뮬러입니다.”

도현은 어제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리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도현은 경험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지치는 전시장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후 2시, 갑자기 멀리서 당당한 걸음의 여성 한분이 뷰티스타 코스메틱 부스 앞에 멈춰 섰다.

“대표님!”

익숙한 목소리였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지우... 씨?”

지우였다. 검은 재킷 위에 밝은 크림색 스카프를 둘러 맨 서지우는 전시장의 복잡한 분위기와는 달리 차분했다. 그녀는 웃으며 부스를 둘러보았지만, 눈빛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배어 있었다.

“어떻게 여길?”

“제가 디자인한 업체가 여기 참여한다고 해서 들렀어요. 그리고 전시회에서 발행한 뉴스레터를 보다가, 참가 기업 명단에 '뷰티스타 코스메틱' 이름이 있어서요. 혹시나 싶어 들렀어요. 많이... 힘들어 보이시네요. 오늘 현장 분위기는 어떤가요?”

도현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냥... 어제랑 똑같아요. 그래도 효진 씨가 홍보 영상을 멋있게 만들어와서 그나마 관심을 조금은 가져 주네요."

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스 구석구석 스캔하듯 살펴보았다.

“대표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거, 부스가 너무 밋밋해요.”

도현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디 부분이요?”

“이 부스요. 제품은 나쁘지 않은데, 바이어가 멈춰 설 만한 ‘포인트’가 없어요. 배경도 없고, 색도 죽어있고, 제품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카탈로그 말고 이 공간만 봤을 때, 고객이 무슨 메시지를 받아야 할까요?”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디자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서 예민한 걸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제품보다 ‘공간’이 먼저 보이는 게 전시장이거든요. 코스메틱과 같은 감성 제품은 더하고요. 그런데 여긴... 솔직히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도록 생겼어요. 귀한 시간을 내어 방문한 바이어는 한시가 급해요. 전시장에 있는 많은 기업과 제품들을 둘러봐야 하거든요. 그래서 ‘왜’ 멈춰야 할지를 명확하게 제시받길 원하죠. 눈에 띄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 말에 효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보탰다.

“저도 사실 옆 부스들이 워낙 화려하다 보니, 우리 부스가 잘 안 보인다고 느꼈어요. 굳이 방문할 필요를 못 찾겠더라고요.”

지우는 메모장을 꺼내 빠르게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대표님, 여기 잠시 앉아 보시겠어요? 지금 당장에는 큰 공사를 하기에 힘들지만, 간단한 배너 하나랑, 제품 진열 방식만 바꿔도 분위기가 크게 달라질 수 있어요. 여백을 줄이고, 메시지를 강조하고, 손이 닿기 쉬운 위치에 제품을 놓는 식으로요.”

도현은 조용히 지우의 메모를 들여다보았다. 단 몇 분 만에 그려진 레이아웃이지만, 확실히 지금보단 훨씬 ‘코스메틱 매장’ 같아 보였다.

“이대로 바꿔볼게요.”

남은 시간 동안 도현과 효진, 그리고 지우는 즉석에서 부스 레이아웃을 바꾸기 시작했다. 배경 롤스크린 대신 색감 있는 포스터를 걸고, 제품은 접객 테이블 위가 아닌 눈높이에 맞춘 선반에 진열했다. 카탈로그는 바구니 대신 사람 손에 닿기 쉽게 놓았고, 도현은 제품 하나하나에 포스트잇을 붙여 간단한 특징을 써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우가 말한 대로 부스 내부에 있는 작은 엑스배너를 입구에 세웠다.

“FOR URBAN MEN, MADE IN KOREA"

그제야 도현의 눈에 뭔가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품도, 부스도, 그리고 자신도.

"이전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뭔가 달라 보이네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볼게요. 다른 거래처도 방문해야 해서요. 그래도… 오늘 여기 와서 다행이에요.”

“지우 씨, 정말 고맙습니다.”

“다음엔 더 나은 모습 보여주세요. 이건 그냥 ‘연습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지우는 그렇게 말하며 부스를 떠났다.

''우리'라고?'

도현은 지우의 말을 되새기며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날 오후, 프랑스에서 온 한 바이어가 잠시 멈춰 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영어로 말했다.

“Is this made in Korea?”

(이거 한국에서 만든 건가요?)

도현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Yes! 100% made in Korea. And specially designed for men’s sensitive skin.”

(네! 100% 한국 제품입니다. 남성의 민감한 피부를 위해 특별히 설계된 제품입니다.)

“Do you have any EU certifications?”

(EU 인증은 있나요?)

“We’re currently preparing for CPNP. But, not yet.”

(현재 CPNP 인증을 준비 중입니다. 하지만 아직 완료되지는 않았습니다.)

“Hmm… interesting. Do you have a test sample?”

(흠... 흥미롭네요. 테스트 샘플은 있나요?)

처음이었다. 지나가던 누군가 제품에 관심을 보이며 샘플을 요청한 것은. 도현은 떨리는 손으로 샘플을 건넸다.

“Please try it. No alcohol, no artificial scent. And it is vegan.”

(한번 사용해 보세요. 알코올도 없고, 인공 향도 없습니다. 그리고 비건 제품입니다.)

바이어가 손등에 제품을 덜어내는 순간, 도현의 심장은 무대 위 배우처럼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이어의 손이 움직이는 매 순간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향을 맡는 그 찰나, 도현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리고 바이어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하나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첫 응답이다.’

“Very clean. I like it.”

(아주 산뜻하네요. 마음에 들어요")

잠시 후, 그는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마티유 드랑(Mathieu Deland)이라고 적혀 있었다.

“Let’s schedule a call next week. I want to know your MOQ and delivery terms.”

(다음 주에 통화 일정을 잡죠. 최소 주문 수량(MOQ)과 배송 조건에 대해 알고 싶어요.)

명함이 그의 손에 건네졌을 때, 어제의 얼어붙은 자신이 스쳐 지나갔다. 부스 한편에서 마비된 채 카탈로그만 내밀던 자신. 그리고 지금, 제품을 설명하고, 눈을 맞추며, 응답을 받아내는 자신을 보며, 단 하루 만에 무언가 조금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도현은 땀이 밴 손으로 명함을 조심스럽게 쥐며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켰다. 바이어가 떠나고, 도현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명함을 쥔 손에 땀이 배어 있었다. 근처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지우는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봤죠? 사람은 결국, 보고 느끼는 거예요. 잘하셨어요.”

도현은 다시 나타난 지우에 깜짝 놀랐지만,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어제의 좌절은, 오늘의 한 줄기 희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도현은 휴대폰을 꺼내 지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지우 씨 아니었으면 또 절망스러웠을 거예요.”

잠시 뒤 답장이 도착하였다.

“처음치고는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 다음은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첫술에 배부를 순 없죠.”

도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그리고 내일, 다시 전시장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드디어 전시회 마지막 날 저녁. 그러나 오늘도 성과는 크지 않았다. 상담 신청은 7건, 샘플 요청은 3건, 그중에서 얼마나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도현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우린 실패한 게 아니야. 아직은 준비가 덜 된 채 도전했을 뿐이다!'

철거 시간이 되자, 도현은 마지막 남은 박스를 조심스레 덮으며 부스를 둘러보았다.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는 모든 게 커 보였고, 자신은 작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열대를 접고, 포스터를 떼며 그는 조용히 효진에게 말했다.

“다음엔 더 당당하게 돌아와요.”

효진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우와~ 우리 진짜 고생했어요, 그렇죠 대표님?”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진짜 많이 배웠어요.”

화려했던 전시장도 하나둘 철수되며 덩그러니 빛이 꺼지고 있었다. 도현은 그 흐릿한 조명 속에서도 무언가 또렷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리고 도현은 기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선생님, 어머님은 괜찮으세요?”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전시회는 잘 끝났습니까?”

도현은 조용히 웃었다.

“망했죠 머. 완전 참패. 저는 제품을 만드는 데만 집중했지, ‘보이게 만드는’ 법은 몰랐어요. 그래도… 저, 다음이 더 기대돼요.”

기석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그 말, 마음에 듭니다, 대표님.”

숙소 창밖. 도현은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지금의 실패가, 내 브랜드를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기억되길. 내일부터 다시 시작이다."

그러나 백상무와 약속한 6달이라는 시간의 끝은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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