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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홀로서기 시작한 날

새로운 환경에서 길을 찾아가는 것이 결국 '나'를 배우는 과정

by 정누리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나온 비행기 게이트 앞에서 이름 'Nuri'가 적힌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처음으로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오게 된 필자에게 '웰컴 홈' 메시지를 손수 들고 마중 나오신 미국의 호스트 맘이셨다. 앞으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하면서 같이 살 분이셨다. 만나자마자 꼭 안아주는 것으로 환영 인사를 해주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몸이 얼어있었다다며 괜히 미안하셨단다. 지금이야 처음 본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포옹할 수 있지만 수줍음이 많았던 그때는 포옹은커녕 가까운 가족들이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 부끄러웠었다.


출국 전에도 몇 달 동안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알아가게 된 호스트 맘에게 가장 먼저 여쭤본 것은 바로 '제가 당신을 마미라고 불러도 되나요?'였다. 나이가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데니스'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기가 아직까지는 좀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호칭 질문 한마디에 마미는 마음이 한순간 녹아버렸다고 한다. 흔쾌히 좋다고 하시고 그로부터 이십 년 가까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 마미라 불리는 것을 좋아해 주신다. 본인의 친딸처럼 대해주시며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신 분이다. 필자 주위에 이런 감사한 분들이 많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필자는 한국에서 태어나, 열다섯이란 나이에 미국에서 고등학교, 학사, 박사 학위를 마치고 생활해 왔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여러 도시에서 살아봤고 현재는 미국 동남부에 있는 조지아주의 애틀랜타에서 거주 중이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1학년 반학기를 마치고 물 건너갔는데 그 당시 비행기 경험이라곤 고작 30분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 간 것이 전부였다. 그러고 나서 생애 두 번째의 항공 경험이 두 번의 비행기를 거쳐 18시간 미국행이었다. 자식이라곤 하나밖에 없는 딸을 보내신 우리 부모님도 대단하신 것 같다. 훗날 생각해 보니, 어쩌면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서' 더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풋풋한 그 시절,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에 대한 설렘이 두려움보다 더 가득했던 듯싶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생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전환점이 될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영화에서만 보아왔던 크디큰 월마트 (Walmart)를 직접 눈으로 보고 또 시리얼만으로 한 통로를 전체 채울 만큼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 없었다. '박사'라는 길을 꿈에 그릴 수도, 그려본 적도 없었다. 주위에서 박사님들을 많이 보고 자라오지도 않았거니와 지금 당장 영어 말귀 하나 알아먹는 게 급급했다.




뇌과학이라는 학문도 내 머릿속에는 더욱 생소롭기만 했다. 생물학은 내 몸에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항상 좋아했지만 뇌에 대한 공부는 막연한 '생각'에만 그쳤다. 한때 학교에서 사과 한쪽을 먹으면서 이런 딴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지금 사과를 먹으면서 머릿속에 사과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만약 내가 그냥 머릿속에서 사과를 먹는다는 상상만 한다면 뇌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물론 그때는 답은 몰랐지만 막연히 뇌가 신기하구나 생각하곤 하였다. 훗날 뇌과학을 배우게 되면서 상상이라는 것도 실제 행동하는 것과 비슷한 뇌 활동 양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각화 (visualization) 기법이 올림픽 선수들에게 몸으로 직접 연습하는 것만큼 효과적이라는 연구도 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이 생각하기 나름인 셈이다.

IMG_6959.jpeg 6년 동안 몸담아왔던 조지아텍 실험실 앞에서


지금 기록하는 2025년 4월. 유명한 학술지에 필자가 6년 넘게 공들인 논문이 실리게 되었다. 남부의 하버드라 불리는 에모리대학 (Emory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를 허가받게 한 연구의 결과다. 졸업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 논문은 이제야 나왔다. 그래서 과학은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뇌과학 박사 학위는 에모리에서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연구는 조지아텍 (Georgia Tech)의 의공학과 (Coulter Dept. of Biomedical Engineering)에서 살다시피 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한 지 벌써 17년 차, 공교롭게도 논문은 장소 기억에 관한 주제다. 우리의 뇌는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배우는가? 그리고 그 낯선 환경에 적응해 가며 특별히 중요한 정보는 어떻게 머릿속 깊이 남게 되는가? 이 질문들을 답하기 위해 태어난 재미난 연구 결과를 다음부터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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