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껍질이 깨지는 순간, 방황은 시작됐다.
추천 BGM : Sigur Rós – Untitled #3 (Samskeyti)
대학교 시절 내 삶은 꽤 단순했다.
훤칠한 키 덕에 연애는 끊기지 않았고, 친구들과 가는 피시방과 게임은 늘 재미있었고,
학점은 망가졌지만 이상하게도 불안하지 않았다.
‘취업깡패라는 공대인데 뭐 어때?’라는 수치를 망각한 긍정적 사고가 현실을 바라보는 시야를 덮었다.
그냥 어떻게든 살아지겠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정말 즐겁고 아무 걱정 없이 대학생활을 오롯이 즐겼고,
미래는 저 멀리 있는, 아직은 내게 닿지 않을 일이라 생각했다.
‘준비’라는 말이 낯설던 시기였다.
‘계획’이라는 말도 낯설었다.
‘자기 객관화’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자신감’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듣곤 현실감만 흐려졌다.
그저 지금 연애가 잘 되니까, 옆에 친구들이 있으니까, 노력하지 않아도 매월 꼬박꼬박 용돈이 입금되니까,
나는 괜찮은 남자일 거라 믿었다.
아니, 그 근자감은 수치심을 모르고 친구들보다 좀 더 넉넉한 용돈에 부끄럽게도, 스스로가 우월하단 생각까지 했었다.
결국 시간은 흘렀고 졸업 즈음, 그동안 직시하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하지 않으려 했던 현실을 마주하게 됐고, 그 결과가 생각보다 처참했음에도 나의 뇌는 실패한 나를 직시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좌절을, 마치 현실이란 포식자의 이빨이 이미 허벅지 깊숙이 들어와 있음에도,
모르는 척하는 게 유일한 생존 전략인 것 마냥,
그 아픔을 회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엔도르핀을 뿜어대며 행복회로만 돌려 댔다.
‘괜찮아, 남들 다 이렇게 사는 걸?’
‘청년 실업률이 얼만데, 그래도 공대니까 어딘가엔 일자리 있을 거야!’
결국 나의 뇌는 현실에 베인 상처를 소독조차 하지 않은 채 반창고만 덕지덕지 붙였고, 나를 조그만 제조업 관련 중소기업으로 인도했다.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열악한 기숙사, 주 5일 연속 일일 12시간 근무와 은근이 강제되던 토요일 오전근무.
그래도 처음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번에도 현실을 보려 하지 않았다. (데드풀 2 중 도미노의 슈퍼파워가 행운이라면 아마 나의 슈퍼파워는 밑도 끝도 없는 ‘초긍정’ 일 것이다.)
그렇게 취업지로 가서도 여자친구를 사귀었고, 데이트가 없는 날이면 PC방에 앉아 게임도 했다.
또 시간은 흘렀고,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평범하게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친구가 말했다.
“오빠랑의 미래가 너무 불안정해 보여.”
그녀는 공무원 준비 중인 남자에게 갔다.
그날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괜찮은 남자’라는 말에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여본 적이 없다.
그렇게 이제껏 벌어질 때마다 막무가내로 덫 붙여오던 반창고가 힘없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