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김장, 한 해의 숨을 저장하는 시간>

땅속에 묻어둔 마음, 우리가 지켜온 가장 오래된 지혜

by 숨결biroso나


배추 이파리 사이로 엄마의 손이 스며들던 저녁,
고춧가루 붉은 숨이 우리 집 겨울을 데우곤 했다.

찬물에 헹구는 소리, 마당에 퍼지던 김치 향,
그 속에서 나는 엄마의 오래된 겨울을 보았다.

땅속에 묻어둔 건 김치만이 아니었다.
말하지 못한 사랑, 견뎌낸 계절들,
그리고 가족을 향한 묵직한 한숨의 온기.

해마다 김장을 할 때면
그 모든 것이 다시 붉게,
다시 따뜻하게 내 안에서 익어간다.





해마다 김장을 앞두면 집 안 공기부터 달라진다. 마당의 양동이와 고무대야, 물컹거리며 숨을 죽여가는 배추, 소금에 절여지는 이파리의 하얀 선 하나 까지... 모든 풍경이 어느새 겨울을 준비하는 표정으로 바뀐다.

손등에 닿는 공기는 차갑지만, 안쪽에서는 오래된 기억이 미지근하게 데워진다. 김장은 늘 그렇다. 몸은 시리지만 마음은 뜨거워지는 붉은 숨결이 깃든다. 김장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온 가장 오래된 지혜이자 계절과 마음을 동시에 저장하는 한 해의 축제이자 의식이다.






배추 절이는 아침. 기다림이라는 삶의 장면이 시작된다. 해가 올라올 무렵, 엄마는 배추를 쪼개 놓고는 이파리 사이사이 소금을 촘촘히 뿌리셨다. 그 손길에는 어떤 망설임도, 어떤 낭비도 없었다.


“이건 서두르면 안 되는 거야. 배추도 사람도 급하면 제대로 스며들지 않아.”


숨겨진 철학은 늘 이렇게 생활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배추는 소금에 천천히 절여질 시간을 받아들이고, 사람도 자신 안의 고집과 상처가 부드러워지기까지는 그만큼의 고요한 기다림이 필요했다.


배추가 물을 뿜어내며 축축이 자리를 낮추는 모습은 마치 우리가 한 해 동안 억눌렀던 마음을 내려놓는 장면 같았다. 겉은 단단해 보여도 속잎은 여리고, 조금의 손길에도 상처가 나는 배추처럼.


마치 살아온 날들을 씻어내는 것 마냥 절인 배추를 헹구는 일은 항상 힘든 과정이었다. 손만 넣어도 얼얼해지는 찬물 속에서 배추를 뒤집고 다시 뒤집으며, 손끝은 금방 붉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그 고통은 불평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차갑지만 깨끗한 물살이 배추 사이를 흘러가는 동안,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 켠이 같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생스럽지?”


엄마는 그렇게 물으셨지만, 그 말 끝에는 ‘하지만 이건 이렇게 지나가야 해’를 품고 있었다.


지나보면 삶도 그랬던 것 같다. 어떤 시기에는 차갑고 매서운 물이 필요하다. 그 물에 씻겨 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다음 계절을 맞을 준비가 되는 것처럼...


붉은 고춧가루, 간 마늘, 생강, 쪽파, 젓갈, 찹쌀풀.. 김장 양념을 만드는 일은 마치 한 해의 기쁨과 슬픔, 성취와 후회를 섞어내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갖가지 양념을 버무리는 시간은 마치 인생을 살아가는 맛의 온도를 닮아있었다.


고춧가루를 붓는 순간 뿜어져 나오는 알싸함, 마늘 냄새 위로 은근하게 깔리는 액젓의 깊은 향, 그리고 찹쌀풀의 따뜻한 묵직함... 그 모든 향들이 더해져 서서히 하나의 색을 만들어갔다.


“이게 바로 맛의 척도야. 마음이 급하면 양념이 설익고, 마음이 비어 있으면 향이 얕아.”


양념을 버무리는 손길을 보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고집이 너무 세면 짜기만 하고, 욕심이 과하면 금세 텁텁해 진다. 적당히 비우고, 적당히 채우면서 자신만의 깊이를 찾아가는 것이다.






김장을 할 때 가장 조용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배추 속을 채우는 때다. 숨 죽은 배추 한 잎 한 잎 사이사이에 양념을 넣으면서 마치 상대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다독이는 것 같다. 배추를 채워 넣는 순간은 우리의 ‘관계’가 익어가는 시간이다.


이파리는 구길수록 쉽게 찢어진다. 사람 마음도 그렇다.”


엄마의 말도 김장 속에 다 숨어 있었다. 손끝으로 양념을 고루 펴 바르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많은 양념을 쏟지도, 너무 적게 남기지도 않는 법을 배웠다.


삶이란, 이렇듯 맛의 균형을 찾아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나치게 간이 세면 오래 못 가고, 너무 싱거우면 마음이 공허해진다. 서로의 마음의 온도와 결을 정확히 알기 전엔 익지 않는 것이다.


양념이 골고루 스민 김치를 꾹꾹 눌러 옹기에 넣는 순간, 자태는 묘하게 깊고 안정적이다. 땅속에 김치를 묻는 데에는 ‘겨울을 견디는 힘’의 비밀이 있었다. 마치 흙벽 같은 마음을 톡톡 두드리며 지금부터 견뎌낼 시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깊은 겨울, 땅에 묻은 장독의 뚜껑을 여는 일은 비밀 상자를 다시 여는 일과 닮아 있었다. 뚜껑이 열리는 소리 하나에 집 안의 시간들이 동시에 깨어난다. 발효의 톡 쏘는 향이 코끝을 스치면, 우리는 어쩐지 유년의 한 장면으로 돌아간다.


갓 꺼낸 묵은지도 날이 선 듯 단단하고, 적당히 익은 신맛 속에는 겨울을 이겨낸 온기가 배어 있었다. 한 조각 베어 물면 살아온 날들을 결로 씹어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건 단순한 맛이 아니라, 삶의 고된 숨이 되씹혀 나오는 질감이다.



김장이란, 거친 계절의 길목에서 찬란한 희망을 뭉쳐 땅속에 묻는 묵직한 약속이다. 그 고요한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겨울을 이겨낼 자신만의 단단한 뿌리를 찾는다.







익어가는 것은 언제나 조용하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더 단단해진다. 겨울을 견디는 힘은 생활의 작은 손끝에서 태어난다. 삶의 깊은 맛은 늘 가장 소박한 자리에서 자란다


해마다 김장을 하면 엄마의 숨이 먼저 깨어난다.
말보다 느린 손길, 손길보다 깊은 온기가 붉은 양념처럼 내 안에 번져와 올겨울도 무사히 건너가라고 조용히 나를 데워준다.



by 《엄마의 숨》 ⓒbiroso나.



땅속에서 잠든 온기는 결국 우리를 다시 데려온다.
깊은 기다림 끝에 피어나는 맛은 삶의 진실과 닮아 있다. 희망은 언제나 가장 조용한 곳에서 가장 뜨겁게 숙성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겨울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김장에세이 #겨울의지혜 #생활철학#장독대의숨

keyword
화, 토 연재
이전 18화<토란국이 끓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