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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보내는 밥상

잘 가라, 나의 여름아

by Taei

한때는 여름이 가장 좋은 계절이었다.

어린 시절의 여름은 마당에 펼쳐둔 돗자리 위에서 참외를 먹으며 낮잠을 자던 기억, 외할머니 댁 앞 시원한 냇물에 발 담그며 해가 질 줄 모르고 놀던 시간으로 채워져 있었다. 여름은 그저 청량함과 자유의 계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온난화 탓인지, 나이 탓인지, 이제는 여름 하면 설레는 기억보다도 숨 막히는 습도와 지치는 고온이 먼저 떠오른다. 예전엔 가을이 시작되기 전, 괜히 마음이 가라앉는 계절성 우울도 있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사라졌다. 오히려 가을이 빨리 왔으면 싶은 마음뿐이다.


오늘은 9월의 첫 점심.

여름과 작별을 고하는 마음으로 밥상을 차렸다. 여름을 버티게 해 준 음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고소한 콩국수, 보양식으로 몇 번이나 끓여 먹었던 닭죽, 매운 고추와 된장, 그리고 김치 한 조각.


문득 지난 7월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무더위에 지쳐 아무것도 하기 싫던 주말, 차가운 콩국수를 앞에 두고 “그래, 이래서 여름을 버티지” 하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웠던 기억. 장마가 길어져 눅눅한 공기에 기운이 빠질 땐 엄마가 해주신 닭죽으로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고추 한 입에 된장을 찍어 먹으며, 단순한 맛이 주는 기운이 이렇게 큰 줄 새삼 알았다.


오늘 밥상은 단순히 점심상이 아니라, 올여름을 버텨낸 나 자신에게 보내는 작은 위로이자 작별 인사였다.


추워지면, 이 음식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보내야 할 시간.


잘 가라, 여름아.

내년에도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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