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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문장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고랜드

by KOSAKA

이 단편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오마주한 글입니다.


나는 문장 설계사다.

남이 쓴 문장을 다시 써주는 일을 한다.

출판사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유령작가’라고 부르지만,

내가 하는 일은 조금 다르다. 나는 글을 쓰기보다는 문장을 암호화한다.


노(老)편집자에게 배웠다.

그는 사람의 기억 구조를 연구하던 이상한 노인이었고,

한때 신경과학자였다고 주장했다.

그가 내게 한 말이 있다.


“문장을 쓰는 건 뇌의 회로를 다시 짜는 일이지.

어느 날 갑자기, 네 머릿속에서 문장들이 독립된 세계를 만들어낼 거야.”


그 말을 들었을 땐 웃어넘겼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서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내 뇌 속에 숨어 글을 쓰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노편집자와 함께 일했다.

그는 내게 “의식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문장을 쓰는 쪽의 세계,

다른 하나는 그 문장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 세계라고 했다.


“너는 그 두 세계를 잇는 중간자야.

글을 쓴다는 건, 현실의 언어를 무의식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지.”


그의 설명은 늘 난해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고 있으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조금 더 정당하게 느껴졌다.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약간의 죄책감을 동반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신 써야 했으니까.


어느 밤, 한 원고를 암호화하다가 잠시 졸았다.

눈을 뜨자 낯선 곳이었다.

회색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고, 하늘은 기묘하게 희미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모두 그림자가 없었다.


나는 그곳의 도서관으로 안내되었다.

사서가 말했다.

“당신은 오늘부터 글 읽는 자가 됩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앞에 쌓인 수많은 유리판에는 흐릿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건 내가 현실에서 지워버린 문장들이었다.

수정하다 버린 단락, 의미 없다고 지운 표현들,

그 모든 잔여가 이곳의 문장으로 변해 있었다.


며칠 뒤, 나는 내 그림자를 만났다.

그는 성벽 근처의 오두막에 갇혀 있었다.

그림자는 내게 말했다.


“넌 너무 많은 문장을 버렸어.

그게 다 나야. 너의 감정, 너의 고백, 너의 거짓말.

넌 글을 정제한다고 하면서 나를 잘라냈지.”


그의 목소리는 내 목소리였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림자가 없는 나는 완벽하게 안정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비어 있었다.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 세계는 네가 버린 문장들의 무덤이야.

네가 더 이상 쓰지 않으면, 이곳은 완전히 닫힐 거야.”


시간의 감각이 사라졌다.

이곳의 해는 떠오르지 않고, 밤은 완전히 오지 않았다.

나는 매일 유리판의 문장을 읽었다.

그 문장들은 누구의 것이기도 하고, 내 것이기도 했다.

한 줄 한 줄 읽을수록 내 기억이 조금씩 사라졌다.


현실의 나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키보드를 거부하고, 언어가 의미를 잃었다.

노편집자의 마지막 편지가 도착했다.


“네 무의식의 세계가 완전히 닫히면, 현실의 넌 사라질 거야.

하지만 걱정 마. 문장은 남는다. 그게 진짜 너니까.”


그림자는 탈출을 제안했다.

성벽 밖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곳으로 나가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남겠어. 누군가는 이 문장들을 지켜야 하니까.”


그림자는 웃었다.


“좋아. 그럼 나는 네 대신 나가겠어.”


그가 성문을 넘어 사라질 때,

나는 그가 가져간 것이 나의 마지막 현실감이었음을 알았다.


성벽 안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

유리판 속 문장들이 희미하게 빛난다.

나는 오늘도 그것들을 읽는다.

읽을 때마다 단어가 조금씩 변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싹튼다.


현실에서는 내 컴퓨터가 꺼져 있다.

누군가 그 파일을 열면, 마지막 문장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문장 속에서 살아간다.”


그 문장은 완벽했다.

삭제도, 수정도 불가능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처럼.


가끔은 생각한다.

글을 쓴다는 건, 현실의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다가가는 일이라고.

그곳은 고요하고, 약간의 슬픔이 스며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세계의 끝’이라 부르겠지.

하지만 나에겐, 그것이야말로 문장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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