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친 오후였다.
하늘은 흐렸지만, 공기는 묘하게 맑았다.
원고를 마감하고, 나는 평소처럼 역 근처의 카페로 걸었다.
점심시간이 막 끝난 시각, 카페 안은 한산했다.
커피 향이 부드럽게 퍼져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마일스 데이비스의〈Blue in Green〉이 흘러나왔다.
피아노와 트럼펫이 조심스레 서로를 돌았고,
그 사이로 커피 향이 느리게 퍼져나갔다.
창가 유리에는 아직 물방울이 남아 있었고,
그 너머로 회색 트럭이 느릿하게 지나갔다.
나는 늘 앉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바리스타가 나를 보고 말했다.
“오늘도 원고예요?”
“네, 방금 끝냈어요.”
“그럼 오늘은 좀 쉬셔야죠.”
“글은 끝나도, 머릿속 문장은 잘 안 멈추더라고요.”
그녀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럼 머릿속도 마감이 필요하겠네요.”
그 말이 묘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대답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천천히 퍼졌다.
온기는 있었지만,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끝나지 않은 글쓰기.’
그게 내 일이었다.
종이를 덮어도 문장은 머릿속에서 계속 이어졌다.
단어를 다 써버린 줄 알았는데,
새로운 문장이 어딘가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창밖에는 젖은 거리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반쯤 접은 우산을 들고 걸었다.
전봇대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순간, 세상이 멈춘 듯했다.
모든 게 고요했지만, 그 고요가 오히려 내 안을 흔들었다.
커피가 식을 무렵,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몇 해째 쓰고 있는 노트였다.
그 안에는 문장들이 빽빽했지만,
정작 나 자신에 대한 문장은 별로 없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살아 움직였는데,
그 사이에서 나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나는 빈 페이지를 펼치고 연필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한 글자를 썼다.
‘글’
그 한 글자를 한참 바라봤다.
나는 매일 단어를 다루지만,
그게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글은 도구일까, 풍경일까.
아니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이름일까.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썼다.
‘누가 정한 의미를 따라 쓰는 일.’
곧 그것을 지웠다.
하얀 지우개 가루가 흩어졌다.
대신 이렇게 적었다.
‘내가 본 세계를 기록하는 방법.’
문장이 종이에 닿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미세하게 울렸다.
낡은 활자 하나가 제자리를 찾은 듯한 감각이었다.
나는 연필을 조금 더 움직였다.
그때 창가에 누군가 앉았다.
검은 코트를 입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오래된 책을 꺼내 들고 커피를 주문했다.
책을 펼친 채, 마치 활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아마 그녀는 자기 언어로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밤이 되자 방 안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책상 위에는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다.
그 빛은 노트 한쪽만 비추고 있었다.
나는 그 아래 앉아 조심스럽게 첫 문장을 썼다.
사전[辭典] 어떤 관점에 근거해 선택된 단어(또는 그에 준하는 말)들을, 일반인이 검색하기 쉬운 순서로 배열하고, 그 발음·표기·의미·용법 등을 적은 책. 때로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도이자,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기 위한 은밀한 일기장. 단어를 모으는 일은 곧 세계를 정리하는 일이며, 의미를 적어 넣는 일은 결국 자신을 다시 쓰는 일.
연필 끝이 종이를 긋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 순간, 그동안 써온 수많은 문장들이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소설의 한 장면이 아니라, 내 세계의 조각들이었다.
나는 연필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는 차가웠다.
멀리서 기차 소리가 낮게 울렸다.
누군가의 하루가 끝나고, 또 다른 문장이 시작되는 소리 같았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제 나는 어떤 글을 쓰게 될까?”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언젠가 이 노트가 다 채워지면,
그건 타인의 세계가 아니라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기록한 첫 사전이 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카페에 들렀다.
바리스타가 내 얼굴을 보고 물었다.
“오늘은 무슨 글이에요?”
“어제부터 사전을 쓰기 시작했어요.”
“사전이요?”
“네, 나만의 사전이죠.”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그런 사전이라면 저도 한 번쯤 보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햇빛이 비쳤다.
비 냄새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건 이제 새로운 문장의 첫 향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