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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스누피가 세계를 견디는 방식에 대하여

말 없이도 누군가의 세계가 되어주는 존재

by KOSAKA

스누피를 처음 본 건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그때는 그 캐릭터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얀 개 한 마리가 빨간 지붕 위에 누워 있는 단순한 그림. 친구로는 우드스톡이라는 노란 새가 있고, 옆에는 늘 고민에 빠져 있는 찰리 브라운이 있었다.


그 모든 풍경이 어디가 그리 특별한가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스누피의 세계는 단순한 어린이 만화가 아니라, 어른이 되고 나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감정의 구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스누피는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모든 대사는 찰리 브라운의 고민, 루시의 투정, 린우스의 철학에서 나온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는 스누피가 그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목소리를 가진 존재라는 점이 흥미롭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스누피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빨간 지붕 위에 등을 기대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은 말보다 더 깊은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 느슨한 자세와 조용한 무심함 속엔, 인간의 걱정과 소란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태도가 담겨 있다.


찰리 브라운은 늘 고민한다. 숙제를 못 했거나, 야구 경기에서 지거나, 혹은 좋아하는 소녀에게 말을 걸지 못해서 가슴을 졸인다. 루시는 단단해 보이지만 불안하다. 린우스는 철학적이지만 담요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모든 아이들은 자신만의 불안과 콤플렉스를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 곁에 스누피가 있다. 스누피는 그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들지도 않고, 도망치는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대신 그저 묵묵히 지켜본다. 때로는 춤을 추고, 때로는 소설을 쓰고, 때로는 전투기 조종사가 된다.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세계를 확장하며, 그것을 통해 세상을 견딘다.


스누피에게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스누피에게 위로를 받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대체로 타인의 기준과 요구에 맞추어 살아가는 일이다. 회사의 일정, 사회적 역할, 관계의 기대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다. 하지만 스누피는 그런 조건에서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찰리 브라운이 실망해 돌아와도, 루시가 언성을 높여도, 세상이 시끄러워도, 스누피는 자기 세계를 유지한다. 그 세계는 아주 단순하다. 조용한 낮잠, 춤추기, 글쓰기, 상상 속의 모험. 어떤 날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어떤 날은 자신만의 비행기로 하늘을 난다. 현실이 그리 좋지 않다고 해도, 상상으로 세계를 다시 쓰면 된다는 메시지가 스누피의 매력이다.


이 점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상상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현실을 버티기 위해선 실용적인 것만 남기고, 비현실적인 것들은 덜어내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스누피는 말한다. 상상은 현실에서 도망치는 방법이 아니라, 현실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일 때가 있다고. 지붕 위에서 뒤척이며 쓰는 스누피의 소설은 완결도 없고, 문장도 허술하지만, 그 허술함 뒤에는 ‘오늘 하루를 견디기 위한 마음의 공간’이 존재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스누피의 ‘무심한 연대감’이다. 스누피는 누구보다 자유롭지만, 동시에 찰리 브라운을 버리지 않는다. 결정적 순간에 스누피는 곁에 있다. 찰리 브라운이 외롭다고 느끼는 날에도, 아무도 그의 작은 승리를 축하해 주지 않는 날에도, 스누피는 말없이 어깨를 내어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 자체가 위로가 된다.


말보다 존재가 더 큰 역할을 하는 관계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조용한 방식으로 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스누피는 말 없이 그것을 상기시킨다.


이런 스누피의 태도는 어쩌면 ‘성숙한 외로움’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스누피는 사람들과 어울리지만, 그 안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는다. 외로움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존재의 거리를 신경 쓰지도 않는다. 혼자인 순간과 함께 있는 순간 사이의 균형을 자연스럽게 유지한다.


이게 어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되는 힘이다. 혼자여도 괜찮다는 감각, 그리고 누군가와 있어도 스스로의 세계를 잃지 않는다는 태도. 스누피는 만화 속 캐릭터이지만, 실은 우리가 닮고 싶어 하는 이상적 자아에 가깝다.


최근에는 스누피가 왜 그토록 널리 사랑받는지 더 명확히 이해하게 된다. 스누피는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을 대신 가지고 있는 존재다. 단순함, 여유, 상상, 분리된 자기 세계, 말없이 주는 연대감. 현대인의 삶은 너무 복잡하고, 너무 가득 차 있고, 너무 빠르다.


마음 한 칸이 모자랄 때, 우리는 스누피를 떠올린다. 빨간 지붕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단순한 그림이 왜 그리 오래 남는지, 왜 책상 위에 스누피 인형을 올려두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지,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어쩌면 스누피는 ‘사는 방식’의 다른 이름이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그러나 누구도 외롭게 하지 않는 방식. 자신의 세계를 지키면서도 타인을 향한 다정함을 잃지 않는 방식. 현실의 무게를 잠시 털어내고 상상 속으로 숨을 고르는 방식. 우리는 모두 그런 삶을 꿈꾸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 그래서 스누피는 캐릭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스누피는 ‘가능한 삶’이자, ‘간직하고 싶은 마음의 상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스누피처럼 살고 싶다. 하늘을 보며 여유를 느끼고, 바람을 들으며 하루를 관찰하고, 지나치게 많은 말 대신 존재로만 관계를 이어가는 방식.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만, 그 단순함을 꿈꾸는 마음이 우리를 다시 하루로 데려다 놓는다. 스누피는 그 마음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은근한 등불 같은 존재다. 결국 스누피는 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작은 마음의 쉼표에 가깝다.


오늘도 누군가는 스누피 인형을 쓰다듬고, 어떤 이는 스누피 그림을 보며 잠시 미소 짓는다. 그리고 그렇게 작은 순간에 마음의 무게가 덜어진다. 스누피는 늘 그 자리에서 말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어쩌면 그 모습 자체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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