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8
오늘은 크루즈 다섯째 날
알래스카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글라시아 베이을 따라 순항하는 날이다.
어제와 그제는 잦은 비와 흐린 날씨 때문에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오늘은 드디어 알래스카다운 장관을 눈앞에서 마주했다.
물은 언제부터인가 이전에 보지 못한 신비로운 옥색으로 바뀌었다. 어쩐지 은은한 무지개가 감도는듯한 색이다.
떠다니는 유빙들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싶더니 곧 안갯속에 감추어졌던 설산들 또한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멀리서 하얗게 빛나는 설산
그 아래 천천히 떠다니는 유빙들
빙하에서 흘러나온 얼음 덩어리들이 물결 위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낮고 깊게 울려 퍼진다.
바람이 살짝 불 때마다 얼음이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 마치 사천 년을 견디어 온 이 거대한 자연이 숨을 쉬고 있는 것만 같다.
이곳은 지구상에서 빙하가 가장 빠르게 후퇴한 지역 중 하나다. 녹아 없어진다는 것이다.
18세기말까지만 해도 얼음이 바다로 백 킬로미터 넘게 뻗어 있었지만,
지금은 다 녹아 그 자리에 바다가 들어섰다.
나는 갑판에 서서
핑크빛 ‘글라시아 칵테일’을 마시며 마저리 빙하를 마주했다.
얼음이 부딪히며 내는 작은 소리들이
멀리서 들려오는 빙하의 숨소리와 겹쳐졌다.
잔을 쥔 손끝은 차가워서 감각이 거의 사라졌지만
이 순간의 냉기를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잠시 후,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렸다.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얼음 조각이 빙벽에서 떨어져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바다로 부서져 내렸다.
사천 년의 시간이 조각이 되어 무너지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바다 위로 파도가 번졌고,
배 전체가 그 진동을 함께 느꼈다.
수천 년 동안 흘러내린 얼음의 층,
그 속에는 겨울의 기억과 바람의 결,
그리고 세월의 무게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비는 여전히 내렸고, 손은 더욱 시렸지만
이 대자연의 일부가 되어있는 지금,
마음은 왠지 뿌듯했다.
나는 속으로 그 감동을 외친다
'만세! 나 알래스카 왔어요'
빙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말이 되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풍경 속에서
나는 인간의 짧은 생을 느꼈고,
나의 욕심 같은 건 자취를 감추었다.
녹는 속도보다 새로 생겨나는 얼음의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전진(생성)하고 있다는 마저리 빙하.
상류의 눈이 얼음으로 변해 천천히 흘러내리고,
차가운 바람과 해류가 그 길을 지켜준다.
사 천년의 세월 앞에 묵묵히 존재하는 것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들,
그 앞에 찰나를 사는 존재가 서 있었다.
대자연의 위용 앞에 감동으로 먹먹해진 하루를 보내고 있던 중, 크루즈 내부 방송이 울렸다. 내일 예정된 캐치칸 항구 정박이 바람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소식이었다. 이미 예약해 둔 흑곰과 와일드 라이프 투어도 취소되었다. 순간 마음 한쪽이 금방 떨어져 나간 빙하처럼 무너져 내림을 느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 너무 실망하지 말자. 알래스카에 와서 마지막 빙하기에 생성되어 사천년을 버티어낸 빙하도 보았잖아. 모든 일정이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오늘 하루만으로도 충분히 알래스카 여행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날이라 여기며 위로해야 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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