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포포와 다음날 있을 유치원의 파티 준비물을 사러 문방구에 갔어요. 백화점의 장난감 코너나 서점 속 소품샵 정도만 가봤지, 문방구는 처음이었죠. 그림책 <알사탕>의 동동이가 갔던 문방구라고 하니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어요. 먹으면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알사탕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부푼 마음을 안고 문방구에 도착하자, 온갖 신기한 물건들에 포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엄마는 파티 준비물을 고를 테니 포포도 마음에 드는 게 있나 한번 둘러보라고 했어요. 하지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서성거리기만 했습니다. 뭐라도 하나 집어주면 냉큼 계산해서 이제 그만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어요. 결국 참지 못하고 보채기 시작했습니다.
‘포포야. 엄마 너무 오래 기다렸어. 이제 그만 골라.’
‘…’
‘엄마는 다 골랐어. 필요한 게 없으면 다음에 다시 오자. 그건 어때?’
‘아니야. 나도 살 거야.’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갔고, 포포는 점점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엄마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뭐라도’ 하나 집어 사달라고 했어요. 뭘 집었는지, 뭐 하는데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면서요. 문방구는 혼자 올걸 후회가 밀려왔고, 이 실랑이를 다 보고 있을 문방구 사장님의 눈치가 보였고, 준비물만 후다닥 사면될걸 저도 골라보라고 선심 쓴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결국 아이의 고집에 엄마의 고집으로 맞대응하는 어리석은 강수를 두어버렸죠.
‘너 그거 정말 필요해? 정말 갖고 싶어?’
‘응. 필요해.’
‘그거 뭐 할 때 쓰는 건데?’
‘…’
‘모르면서 뭐가 필요하다는 거야. 내려놔. 다른 거 골라. 진짜로 갖고 싶은 걸 고르라고.’
‘그럼 이건?’
‘그건 오늘은 못 가지고 놀아. 사줄 수는 있는데, 내일 가지고 놀겠다는 약속 하면 사줄 거야. 아니면 못 사줘.’
‘왜 오늘은 안돼?’
‘네가 지금 문방구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내고 있잖아.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 그건 밖에서 쓰는 장난감이잖아. 오늘 밖에서 놀고 갈 시간까진 없어.’
‘다 안된대!!’
결국 잔뜩 뿔이 난 포포의 손을 포획하듯 잡고 문방구를 나와버렸습니다. 포포는 집에 가는 길 내내 속상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어요. 보로통한 얼굴로 저녁을 먹는 아이를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죠. 얼마나 아이를 재촉했는지. 얼마나 제멋대로였는지. 그래서 얼마나 못난 엄마였는지. 정신을 차렸으면, 응당 사과를 해야겠지요. 침대에 누워 문방구에서의 일을 물었습니다.
‘엄마가 문방구에서 너무 재촉했지. 미안해. 기분이 어땠어?’
‘안 좋았어. 엄마가 다 안된다고 해서 속상했어.’
‘그랬구나. 미안해. 엄마가 빨리 고르라고 해서 조급했지?’
‘조급이 뭐야?’
‘쫓기는 기분. 아침에 유치원 버스 놓칠까 봐 허둥지둥 나갈 때가 있잖아. 그때 포포는 조급한 거야.’
‘응. 조급했어’
‘그래. 다음부터는 엄마가 좀 더 기다려줄게. 포포는 문방구 처음 간 건데. 그럴 수 있지. 다 멋지고 신기해서 고르기가 힘들 수 있지. 그럼 우리 내일 한번 더 갈까? 내일은 일찍 가서 여유 있게 고르는 거야. 대신, 정말 포포가 갖고 싶은 거. 포포한테 필요한 거. 딱 하나만 사기. 어때?’
‘좋아!’
사과와 알량한 약속으로 죄책감을 조금 덜어냈지만 마음은 여전히 소란했어요. 아이의 잠든 얼굴은 잘못한 게 없어도 ‘내일은 더 잘할게’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거든요. 죄지은 엄마는 오죽했겠어요.
그렇게 내일이 되었고, 우리는 각자의 비장함을 안고서 문방구로 향했습니다. 기다려주겠다 작정을 하니 아이의 얼굴이 잘 보였어요.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았던 어제의 두 눈이 오늘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죠. 아이는 이것저것 물었고 저는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클레이와 슬라임은 뭐가 다른지, 문방구에 있는 공기가 우리 집에 있는 것과 왜 다르게 생겼는지, 장난감 프로펠러를 날리면 우주까지도 갈 수 있는지, 말랑이 인형은 조물거리는거 말고는 또 뭘 할 수 있는지.
문방구의 절반쯤을 보고 나니 슬슬 눈치가 보였어요. 다른 손님이 없긴 하지만 너무 오래 머무는 건 예의가 아니니 조금만 서둘러주면 좋겠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아주 약간 속도가 붙긴 했지만, ‘다 멋있어서 고르기가 힘들어’라는 말과 함께 결국 모든 궁금증을 다 쏟아내고서야 단 하나를 골라내었습니다. 그가 고른 최초의 문방구템은 양면으로 된 작은 보드. 앞면은 블랙보드, 뒷면은 화이트보드이고 앙증맞은 분필과 마카가 함께 있었지요. 이걸 얼마나 쓸까 싶어 못 미더웠지만, 약속했던 대로 신중하게 하나를 고른 아이가 기특하기도 했어요.
계산대로 가니, 내내 고요히 자리를 지키던 문방구 할아버지가 ‘엄마가 대단하네. 이 정도 물어보면 다들 혼내기 바쁜데. 엄마가 대단해.’라고 합니다. 혼내기 바빴던 어제의 저를 알기에 너무 부끄러웠지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나오는데, 포포도 큰 소리로 인사를 합니다. ‘감사합니다! 멋진 경청하는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뒤에 오는 말은 유치원의 4월 인사말입니다. 포포가 할 수 있는 가장 예의 바른 감사인사였던 거지요.
아이들은 궁금한 게 참 많아요. 세상 모든 것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덕분에 그들의 시간은 느리게 느리게 흐릅니다.
오토바이는 왜 저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지, 왜 벽에 커다란 못이 박혀있는지, 왜 어떤 횡단보도는 노란색인지, 강아지는 왜 전봇대 아래에 오줌을 싸고 가는지. 한걸음마다 질문을 해대니 5분 거리가 30분이 걸릴 때도 있어요. 멍하니 서서 하늘을 빤히 보기도 하고, 그러다 비행기를 만난 날엔 ‘엄마엄마 비행기똥이야!’하며 반가워해요. 민들레 꽃씨를 불고,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비비탄 총알을 찾고, 예쁜 솔방울들을 자전거 바구니 한가득 담아요. 아이가 없다면 그냥 지나칠 것들이지요. 이 계절에 민들레 꽃씨가 이렇게나 지천으로 깔려 있다는 사실은 아이가 없었다면 몰랐을 거예요. 5분 거리를 3분 만에 가버리니 알 턱이 있나요.
문득, 육아에 가장 필요한 자질은 ‘기다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거뜬히 놀아줄 수 있는 체력. 지금 시점에서 내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아내는 정보력. 아이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해 주는 센스. 요즘 세상이 엄마들에게 요구하는 자질들입니다. 많기도 하네요. 그래서 엄마들은 짬을 내어 운동을 하고, 각종 sns를 두루 섭렵하여 정보를 얻고,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의 감정에 오감을 총동원해요. 저도 정보력은 좀 부족하지만, 체력과 센스는 뒤처지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답니다.
그런데 기다림은 조금 다른 차원의 능력 같아요. 타고난 재능 같달까요. 제가 잘 못 기다리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비단 육아가 아니더라도, 기다려주는 사람은 귀합니다. 채근하지 않고 서성거리지도 않고 묵묵하게 때로는 고요하게, 상대방의 시간을 지켜봐 주는 사람. 기다려준다는 것은 그의 시간을 존중한다는 것이고, 그 원천은 결국 사랑이겠지요. 그러니 기다려줄 줄 아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기다림이라는 재능을 타고나진 못했지만, 흉내는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암시하듯, 스스로에게 ‘나는 원래 잘 기다리는 엄마야.‘라고 말해주는 건 어떨까요. 아니면, ‘어제는 못했지만 오늘은 기다려본다. 오늘 했으니 내일도 할 수 있을 거야.’ 이런 마음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기다림은 사랑이고, 나는 아이를 사랑하니까요. 그러니 기다림을 연습할 수밖에요.
어제는 유치원 버스를 타지 못하고 걸어서 등원을 했습니다. 유치원 버스를 태워 보내고 집에 들어오면 9시인데요. 어제는 집에 오니 10시가 훌쩍 넘었어요. 갑자기 길이 길어진 것도 아니고, 매일 하원하는 길을 거꾸로 올라간 것뿐인데, 참 신기하지요. 출근하고 등교하는 사람들로 오후보다 활기찬 골목길이 포포의 눈에는 많이 달라 보였나 봐요. 버스로 휙 지나가던 풍경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천천히 천천히 걸었습니다.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기다려주겠다 생각하면 또 잘 기다려져요. 그래서 어제의 도보등원은 포포도 저도 이기는 게임이었습니다. 포포는 찬찬히 구경하고 마음껏 물어보니 좋았을 테고, 저는 잘 기다렸다는 마음에 뿌듯했고요.
일단 어제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어제도 했으니, 오늘도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기다림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스스로에게 너그러운 편이거든요. 어제 못했으면 오늘 하면 되고, 오늘도 못하면 내일 하면 됩니다. 그렇게 우리 잘 기다려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