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자-함민복
줄자
줄자는 감겨 제 몸을 재고 있다
자신을 확신해야 무엇을 계측할 수 있다는 듯
얇은 몸 규칙적인 무늬
줄자의 중심엔 끝이 감겨 있다
줄자는 끝을 태아처럼 품고 있다
수도자의 뇌를 스르륵 당겨본다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함민복, 창비(2013.02.22)
줄자는 세상을 재기 전에 먼저 자신을 감아 스스로를 잰다. 그 쓰임의 근원은 안으로 말려 있는 끝에 있다. 마치 자신을 확신해야만 비로소 외부를 잴 수 있다는 듯이.
줄자의 중심에는 끝이 감겨 있다. 그 끝을 태아처럼 품은 채,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안고 있다. 그 모습은 존재의 본질과 자기 확신, 그리고 성찰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세상과 타인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계측하고, 내면의 중심을 단단히 세워야 한다. 모든 판단과 행동은 결국 내면의 기준에서 비롯되므로.
수행자가 번뇌를 걷어내듯, 줄자가 천천히 펼쳐지듯, 우리도 자신을 밖으로 길게 펼쳐보아야 한다. 중심을 단단히 감은 채, 때로는 그 끝을 용기 내어 당겨보는 것. 그 순간이야말로 자신과 세상의 거리를 올바로 재는 진정한 성찰의 시간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타인을 재는 일이 아니라, 자기 안의 중심—줄자의 끝이 감겨 있는 그 지점—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시인처럼 ‘수도자의 뇌를 스르륵 당겨본다’.
조심스럽게 오늘을 펼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