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7. 잘 가거라, 눈물겹던 날들아

김사인-화양연화(花樣年華)

by 소걸음

27. 잘 가거라, 눈물겹던 날들아/김사인-화양연화(花樣年華)


화양연화(花樣年華)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어린 당나귀 곁에서』, 김사인, 창비(2015.01.15)




김사인의 「화양연화」에 부쳐 ― 다시, 화양연화


「화양연화」에 부쳐 ― 다시, 화양연화


그래, 가거라 아름다운 날들아.

돌아보지 말고


나는 여기 남아

희끗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너희가 남기고 간

먼지 낀 유리창을 닦으리라


흘러간 날들의 발자국을

나는 아직 신발 밑창에 품고 걷는다.

주홍 머리핀처럼,

가벼운 것들이 오래 아리다는 것을


꽃장화 소리 멀어지는 길목에서

나는 배웠다―

빛나던 것들은 다 멀어져야 비로소

그 빛을 온전히 알게 된다는 것을


잘 가거라, 눈물겹던 날들아.

슬픔 없는 나라에서

영원히 젊은 채로 뛰어놀거라


나는 여기서

너희를 기억하는 것으로

늙어가리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바람이 한 잎씩 떨굴 때,

저물어가던 나의 창가에도

다시 작게, 붉게

화양연화가 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