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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하루는 한 편의 서사시처럼

하루가 나를 지나가지 못했던 것처럼

by 정써니

잡지 못한 순간들,

말로 꺼내지 못한 마음들,

그 모든 것이 어둠 앞에 고요히 쌓인다.

— 시인의 노트中

하루를 보내며


여명은

아침을 불러냈다


숨 가쁜 호흡과

한낮의 열기는

또 다른 열정에

닿지 못하고


붉음을 토하며

조용히 저문다


지나지 못한 시간,

손댈 수 없는 마음


붉음과 푸름은

시나브로 하나 되어


어둠을 향한

길목에 머문다


규칙을 지키는

한 편의 서사시처럼


#시인의 노트

어떤 하루는 공기부터 다르게 느껴진다.

푸르름이 먼저 다가오고, 그 위로 태양이 뜬다.

몸 안에 쌓여가던 무언가가

한낮의 열기 속에서 천천히 움직인다.


하지만 열정은 언제나 닿을 수 없는 어딘가에 있는 듯하고,

시간은 그 끝에서 붉음을 남긴 채 저문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러간다.

잡지 못한 순간들, 말로 꺼내지 못한 마음들,

그 모든 것이 어둠 앞에 고요히 쌓인다.


내가 보낸 하루는 사실,

내가 다 건너오지 못한 하루였다.


그럼에도 자연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자신의 순서를 따라간다.

그 질서 앞에 멈춰 선 나는

오늘도 한 편의 서사시를

조용히 읽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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