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떠난 여름, 마음에 아주심기
밤이 맛있어지는 건
가을이 깊어진 까닭이고,
곶감이 달아지는 건
겨울이 무르익은 덕이다.
그리고 나는 여행을 통해,
내 삶의 깊이를 준비한다
천상병 시인은 인생을 소풍이라 했다.
그 말은 오래 들여다볼수록 은근한 여운이 있다.
잠시 들렀다 가는 인생, 그 안에서 우리가 붙잡는 작은 기쁨과 순간들.
그중에서도 여행은, 아마도 그 소풍 속에 몰래 끼워 넣은 특별부록 같은 존재일 것이다.
여행을 떠나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다듬어지고
생각은 조금 더 깊어진다.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낯선 장소에서는 문득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익숙함이 걷어낸 자리에 새로운 감정이 들어오고,
그 틈에서 나는 나를 다시 바라본다.
가을에 떠나는 여름이 있는 곳.
계절이 엇갈리는 풍경 속을 걷다 보면
내 안의 시간들도 서로 포개진다.
겨울이 되기 전에 미리 싹을 틔우고,
봄이 오면 조용히 뿌리를 내리는 ‘아주심기’처럼
여행도 그렇게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삶의 깊이를 만들어준다.
밤이 유난히 맛있다는 건
가을이 충분히 익어갔다는 뜻이고,
곶감이 달아지는 건 겨울이 깊어졌다는 신호다.
그렇다면 여행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나는
아마도 더 깊은 내 삶을 조용히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열정으로 춤추는 이 가을,
나는 잠시 멈추기 위해 여행을 선택했다.
손에 쥘 수 없는 순간이라도
내 마음 위에 고요히 내려앉는 그 한 장면이
내겐 충분한 이유가 된다.
멈춤으로써 더 멀리 가기 위한 시간,
그 시간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결국 여행은
삶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이유이며,
또 다른 삶의 모양새이다.
그 속에서 남겨진 마음들은
언젠가 봄의 자리에서
새로운 나를 피워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