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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붙이지 못한 첫...

by 솔라담



"그래서 오빠 첫키스는 뭔데?"
오랜만의 부부 동반 술자리. 가벼운 농담들 사이로, 아내가 장난스럽게 묻는다.
나도 모르게 첫키스의 정의부터 떠올리는 찰나, 어릴 적 친구가 야단스럽게 말을 꺼낸다.
"맞다! 너 첫 그거 초등학교 4학년 때 그거 아니야? 너도 기억나지? 그거?"

"아... 그 애. 나도 잊고 있었네. 아 근데 나도 진짜 기억 안 나. 그 얘기는 그냥 패스!"
농담처럼 넘기려는데, 아내가 짓궂게 웃으며 다그친다.
"뭔데? 궁금하게 나만 모르는 얘기할 거야? 알려줘!"
"그냥 어떤 여자애가 내 볼에 뽀뽀한 적 있었어. 아주 어릴 때. 그게 다야"
"아닌데? 오빠, 나한텐 못 숨겨. 뭔가 많이 창피한 눈치인데?"

맞다. 그게 다는 아니다.
그리고, 이건 꽤 부끄러운 이야기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한 여자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고,

그것이 첫사랑이라는 걸 뒤늦게야 알게 된 어린 날.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 나간 반장 선거에서는 1학기, 2학기 연달아 떨어지고,

나는 왜 특별하지 못할까. 낙심했던, 유독 더웠던 가을날.


우리 반에 한 여학생이 전학을 왔다.

걸음이 느리고 늘 팔을 베베 꼬며 말을 더듬던 친구였다.

선생님께서는 약간 몸이 불편한 친구인데, 곧 생길 특수학급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동안 우리 반에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한 학기 동안 이 친구 도우미가 되어 줄 사람?"

선생님의 말씀에 바로 번쩍 손을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좋아하던 아이 눈에 잠시라도 멋져 보이고 싶었다.

다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을 줄이야......


도우미는 주번도 청소도 면제받았지만

통학도 함께하고, 숙제도 도와줘야 했다.

어린 내겐 생각보다 훨씬 더 귀찮고 힘든 일이었고,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면 바보 같다고 화내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선생님이 내 이름을 호명하며 박수를 쳐주실 때,

친구들도 따라 박수 치며 내게 환호해 줄 때,

그때만큼은 누구보다 특별하다고 느껴졌다.

사실, 그때 버틸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좋아하던 아이가 준 쪽지 한 장이었다.

'정말 대단하다. 응원해!'라고 딱 한 줄이 적힌.


도우미 생활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던 완연한 가을 소풍날이었다.

울긋불긋한 산에서 펼쳐진 백일장에 참가했다.

"내 친구의 걸음은 느리지만, 내가 손을 잡아주면 바른 길로 인도해 준다.

내 친구의 말은 느리지만, 잘 들으면 항상 바른말을 해준다."

이런 식의 글로 난 상을 받을 수 있었다.

부끄럽게도 난 손을 잡아준 적도, 이야기를 잘 들어준 적도 없지만...



며칠 후, 그 아이 어머니께서 반 아이들 수에 맞는 햄버거를 사 오셨다.

교탁 앞으로 날 부르시더니 껴안고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상을 받은 건 나였고, 글의 내용은 솔직히 부끄러웠지만...

반 아이들은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그 덕분에 한동안 칭찬 속에 살았다.

그 시간들은 어린 마음에 마치 내가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다른 반 말썽쟁이가 말했다.

자기가 대장인 줄 아는지, 어른 흉내까지 내며 건들거리던 놈이었다.

"쟤가 네 애인이라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아니긴 뭐가 아냐. 애인 맞잖아. 장애인."


그 순간, 속에서 뭔가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주먹질을 하며 덤벼들었지만,

상대는 태권도를 배운 애였다.

얼마나 맞았는지 코피가 터지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내가 맞는 동안 싸움의 이유가 된 아이는 옆에서 펑펑 울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 울음을 참아낸 내가 대견하다.

다만 그 억울함과 분함에 그날 밤 집에서는 한없이 울었다.

맞은 상처보다 마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던 밤이었다.


그리고 다음 월요일, 조회 시간.

전교생 앞에서 조회대에 올라 교장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

"놀림받는 친구를 지켜준 멋진 기사에게 박수!"

순간 쏟아진 박수와 환호.

숨이 멎을 듯 벅찬 그 느낌은 아직도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


이후 며칠 동안, 전교에서 제일 멋진 학생처럼 대접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럽지만, 그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 두 번째 쪽지를 받았다.

"오, 너 생각보다 멋지더라? 다시 봤어~"


2학기 말, 특수학급이 생기고 그 아이는 우리 반을 떠나게 되었다.

마지막 인사를 전하려 교탁까지 부축해 걷는 길은, 언제나처럼 오래 걸렸다.

그 느린 걸음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동안 즐거웠어. 항상 날 이상하게 보는 게 제일 힘들었는데, 너희는 안 그랬어. 고마워."

그리고 내게 말했다.

"특히 매일매일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그 순간, 그냥 앞만 보고 웃었다.

민망해서였는지,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귓속말을 하려나 싶던 찰나,

내 볼에 입을 맞췄다.


교실이 잠깐 멈춘 듯하다가,

곧 놀람과 놀림이 뒤섞인 함성으로 가득 찼다.

누구의 웃음소리였는지, 누구의 손가락질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모든 소리가 화살처럼 꽂히는 듯했다.

고개를 숙였지만, 피부 속까지 화끈거렸다.

그 순간, 좋아하던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어울려."

한마디에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그 말만 또렷하게 남았다.

그 순간, 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부끄러웠는지, 무서웠는지.

울음을 참지 못한 채 교실을 뛰쳐나갔고,

그 길로 집까지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옆구리가 찌르듯 아팠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가슴 깊은 데서 밀려오던...

슬픔도 분노도 아닌, 지금까지도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 이후 나는

5학년, 6학년 내내 그 아이를 피해 다녔다.

특수학급은 1층 구석에 있어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지만, 항상 신경이 쓰였다.

한 번은 멀찍이서 눈이 마주쳤는데,

나는 있지도 않은 친구 이름을 부르며 자리를 피했다.

그 아이의 표정은... 못 본 건지, 일부러 안 본 건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1층 복도를 걷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릴 땐 그냥,
좋아하던 아이 앞에서 창피를 당한 게 너무 부끄러워서 였겠지, 정도로만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깊은 생각은 애써 외면한 것 같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 일을 잊으려 했다.
마주하기 두려워서였을까...

어른이 되고, 결혼도 하고,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의 기억은 가끔씩 마음속 틈 사이로 불쑥 얼굴을 내민다.
아무 일도 없던 듯 덮어뒀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새어 나온다.

두려움을 억누르고 그 진실을 슬쩍 바라보면.
나는 그 아이를, 어쩌면 내 잘난 척을 위한 도구처럼 여겼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게 부끄러워 흘린 눈물이었던 건 아닐까.

아무튼 그게 내 첫키스다.
아름다운 기억도,
부끄러운 추억도 아닌...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 하나.
지금까지도 설명할 수 없고,
떳떳이 대면할 수 없는,
그 시절 우리 모두의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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