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대체 얼마나 걸은 걸까,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다. 싸구려 플라스틱 슬리퍼는 발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다.
어둡다. 숨이 찬다. 공기는 끈적이고, 바닥에선 열기가 올라온다. 끈적한 옷이 피부에 쩍쩍 붙는다.
대체 여긴 어디지? 겨우 어둠에 적응한 눈에 스치는 나뭇잎은 낯설기만 하다. 아니, 나무가 아니구나. 거대한 풀들.
근데 나는 누구지... 땀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하다. 나는 왜 걷고만 있지... 한 걸음 한 걸음이 끔찍하지만 계속 걷게 된다.
'윽'
머리가 아프다. 아니,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누군가 머릿속을 휘저은 듯 기억이 혼란스럽다.
정신없이 떠다니는 기억의 파편을 잡아보려 애쓴다. 아름다운 여성. 드라이 마티니. 가슴이 드러난 붉은 드레스. 일탈과 배덕의 순간. 짙은 키스. 안 먹던 술을 과하게 마셔서일까? 아니... 숙취와는 다른 두통이다. 그리고 온몸의 통증. 무엇보다 방금의 기억은 지난 일인 듯 아득하다.
또 다른 기억의 단편을 더듬는다. 눈이 째진 남자. 동업자다. 자금 문제로 크게 다툰 후 사업을 정리하기로 했다. 일단 먼저 가서 지분을 정리하라고. 티켓도 끊어주고, 도착해 보니 이상형의 여자도 붙여줬다. 자식, 화해를 건네는 건가? 싶었던 기억. 그래, 나는 30대 사업가. 이곳은 외국이었다.
"빵, 빵!"
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멈춘다. 검게 탄 피부의 남자 한 명이 내리며 내게 묻는다.
"괜찮으세요? 아니,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일단 얼른 타세요."
한국말이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몰려온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 이게 내 목소리가 맞나 싶다.
온몸을 적신 땀 때문인지 에어컨 바람이 더욱 서늘해서 소름이 돋는다. 잔뜩 움츠러든 몸으로 차 안을 훑는다. 운전석에 설치된 두꺼운 플라스틱 가드. 택시였나? 나도 모르게 바지춤에 손이 갔으나 주머니는 없다. 그걸 본 건지 기사가 말한다.
"여기 트럭 진짜 많이 다니는데 큰일 날 뻔했네요.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정신없어 보이시는데 시원하게 한잔 드세요."
주스 캔을 건넨다. 시원하다. 바짝 마른 솜이 젖어가는 느낌. 씁쓸한 뒷맛. 무슨 과일인지 이국적인 맛이 난다. 그게 대수랴.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큰 숨을 내쉰다.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담배 한 대 드릴까요?"
"아뇨, 담배는 안 피웁니다."
어? 기사가 뭐라 혼잣말을 한 것 같은데?
"역시 뭐요?"
"아, 역시 한국분이었다고요."
내가 정신이 없긴 한가보다. 일단 지나간 기억을 찾는데 집중하자.
다시 조각난 기억을 맞춰본다. 호텔 방. 드레스를 내리는 여성. TV옆에 빼둔 반지. 헐떡이던 뒷모습. 필름이 끊겼다. 깨어나보니 공사장 같은 곳이었다. 맥락 없는 폭력. 난생처음 본 사람에게 당했던. 쉴 새 없는 일방적 구타. 몽둥이를 휘두르던 사무적인 눈빛. 그때 기억이 돌아오자 온몸의 상처가 다시 비명을 지르는 듯 온몸이 찌릿하다.
내 스마트폰. 모르는 계좌. 송금을 요청하라고 했다. 아내에게. 비디오를 찍어뒀다며. 누군가와의 통화. 어떤 대화가 오간 걸까. 내가 외쳤다. 동업자에게 요청하라고. 바로 보내줄 거라고. 그간 무표정하던 놈들의 비린내 나던 실소.
바닥에 쓰러져 피만 토하던 내게 건네준 물. 겨우 목을 축였다. 씁쓸한 맛. 방금 전까지 뼈마디마디가 느낀 매질. 영원할 것 같던 통증. 그런데 어느새 고통 속에 웃고 있었다. 두 손이 묶인 채로 겪은 이해할 수 없던 황홀경. 아마도 이상한 약이었겠지. 내가 완전히 취한 걸로 보고 잠시 풀어줬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제정신도 아닌 채 도망친 거고...
다행이다. 다행이다... 그래도 도망쳤다. 안도의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정말 천운으로 한국인을 만났다. 창밖으로 눈에 스치는 이정표.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문자. 대체 어느 문자일까. 생면부지 타국에서 온갖 수난을 겪었지만 그래도 나는 살았다. 괜찮냐는 물음은 정말 구원 그 자체였다.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사장님. 그런데 어떻게 알고 저한테 한국말을... 어찌?"
"아 이 시골에 외국인은 다 상품밖에 없어요. 간만에 특등품이 들어왔다더니 없어졌다고 난리였거든요."
뭐...? 뭐? 상품? 내가?
"쾅! 쾅!"
있는 힘껏 발로 차도 운전석 가드는 꼼짝 않는다. 창문도, 문도 안에서 열리지 않는다.
"멈춰! 차 세워 이 새끼야!!"
"어휴 금방 가니까 한숨 주무세요. 덩치가 커서 그런가 약발이 늦네"
약발? 어쩐지 주스가 쓰더라. 안 된다. 안 된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안 된다 젠장...젠장.....
"세워! 문 열..어! 문...열..라...고......."
"어휴 술도 안 한다더니 간이 튼튼해서 그런가. 특등품이라더니 참나"
귓가에 흐릿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점..점... 아득...해진다......
살...려................
.........히..히...기분......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