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밤
온라인 추모공간이 열렸습니다.
나도 참여했습니다.
밤새 기사를 정리하고, 카톡을 뒤적이며,
추모와 서명 링크를 적어두었습니다.
프로필 하나에 내 마음이 다 실렸습니다.
그러다 새벽 4시...
빗소리가 들리고, ‘조금 있으면 출근인가’ 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눈을 떴습니다. 6시였습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됩니다
나는 내 친구와의 마지막 메시지를 찾아봅니다.
나도 무심했습니다.
나는 나빴습니다.
그는 늘 “괜찮다”라고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학생 이야기를 하며 웃고, 수업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누가 도움을 요청하면 가장 먼저 달려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렇게 떠났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생각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작고, 개인이 이렇게 무력하다는 걸
나는 그제야 실감했습니다.
고인의 아내분도 친구라서,
감히 뭐라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힘내’라는 말은 너무 가벼웠고,
‘미안하다’는 말은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살아남은 게 죄스럽고,
그가 남긴 빈자리 앞에서
미안함이 덩어리처럼 목을 막았습니다.
이걸 쓰는데도 눈물이 납니다.
그래도 쓰는 것밖에 할 수 없어,
눈물로 키보드를 탁탁 두드립니다.
하늘을 봅니다.
흐리고,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올해는 왜 이렇게 비가 많이 올까요.
나는 하늘로 올라가 구름 속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를 상기합니다.
▷ 비행기 안에서 과자 봉지가 빵빵해졌다며 깔깔대던 그 장면.
“썩은 거 아냐?”
“야, 너 과학 선생님이 이걸 몰라?”
둘 다 웃어버렸던 기억.
(비행기는 기압이 낮아서 과자가 빵빵해집니다)
▷ 12년 전, 우리는 케냐로 떠났습니다.
남반구에서 초승달을 보며 티격태격하던 그날 새벽처럼.
(남반구는 그믐달 시간에 초승달이 뜨거든요.)
모든 게 신기하고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그런 기억들 사이로
하늘을 지나, 달을 지나, 태양을 지나며
우주 속의 작은 점인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문득,
죽음이란 뭘까, 삶은 또 뭘까,
이 모든 게 아무 의미 없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툭— 사무실 자리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있을 순 없었습니다.
같이 힘든 날도 많았습니다.
퇴근길, 길가에서 맥주 한 캔을 따고
서너 시간을 수다로 보내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금방, 1주일이 지나갔습니다.
그때 그는 말했습니다.
“교사라는 건 결국 사람들 사이의 일이야.”
그 말이 요즘처럼 자꾸 귓가에 맴도는 적이 없습니다.
저도 일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단체방이 많습니다.
업무 공지, 일정 조정, 평가 계획, 서류 요청,
그 사이사이에 추모글과 서명 링크를 붙여 넣습니다.
더하다 보니 약 700여 명쯤에게 서명 링크를 공유했습니다.
그중에 백 명만이라도 마음을 함께해 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갑니다.
믿기지 않는 날들의 연속 속에서
나는 여전히 출근을 합니다.
학교는 여전히 아이들이 있습니다.
교사들은 여전히 학교에 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 자리를 지키는 일.
그리고,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이들’을 지키는 일입니다.
학교에서 누구보다 아이들을 위해 애쓰고,
수업 준비에 밤을 새우고,
방송기기며 정보장비를 다루지 못하는 동료들을 위해
불편을 감당하며 뛰어다니던 내 친구.
그렇게 성실히, 그렇게 인간답게 살았던 사람이
결국 더 큰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지켜왔던 걸까요.
부디,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더 이상 피해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그의 삶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교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요.
#비가멈추지않는교실에서 #교사는사람입니다 #학교
#교사추모 #교육의존엄 #아이들을위해 #플루토씨 #브런치스토리
#교사의삶 #동료를기억하며 #비가내리던날 #교직 #교육 #추모 #존중
할 수 있는 게 이거라도 있어 다행입니다.
부디 살펴봐주시고, 깊은 관심으로 서명에 동참부탁드립니다.
불편하신 분들께는 거듭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