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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인과율, 그리고 인간의 책임

by 신아르케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자유’라는 단순한 말 속에는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단지 “나는 자유롭다”라고 선언하기 전에, 그 말이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지 성찰할 의무가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이성이 경험의 한계를 넘어설 때 필연적으로 안티노미(이율배반)에 빠진다고 말했다. 그 네 가지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자유의 문제다. 경험 세계에서 모든 현상은 인과율의 사슬에 묶여 있다. 비가 오는 까닭은 구름이 형성되었기 때문이고, 구름은 물이 증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없이 원인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위도 단지 인과율의 한 고리일 뿐일까?

만약 자유가 인과율에서 완전히 벗어나 스스로 최초 원인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많은 행위는 자유가 아니다. 배고픔 때문에 음식을 찾고, 분노 때문에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연결일 뿐이다. 이 논리를 극단까지 밀고 나가면 인간은 자유 없는 수동적 존재가 되고, 사법 제도 역시 무의미해진다. 범죄자는 “나는 유전적 성향과 불운한 환경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여기서 다른 길을 제시한다. 인간은 자연 속 현상으로서 인과율에 속하지만, 동시에 도덕적 주체로서 자유를 지닌다. 『실천이성비판』에서 그는 자유를 도덕법칙의 조건이자, 도덕법칙을 통해 확증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도덕법칙은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보편적 명령, 곧 정언명령이다. 자유란 충동의 해방이 아니라, 스스로 입법하는 이성의 자율성이다.

이 지점에서 책임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칭찬과 비난을 가하고, 법적 책임을 묻고, 정의를 요구한다. 이는 인간을 단순한 설명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규범적 판단을 내리는 주체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바로 이 지점에서 확인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도덕적 자유를 양심의 소리로 이해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서 울리는 당위의 목소리는, 나에게 신의 음성처럼 다가온다. 물론 이는 철저히 개인적 해석일 뿐이다. 칸트는 자유·영혼·신을 ‘실천이성의 요청’으로 보았지만, 나에게 그것은 신앙과도 연결된다.

자유는 과학적 실험으로 입증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옳고 그름을 구분하고 책임을 지려는 태도—자체가 자유가 실재함을 보여 준다. 자연의 인과율을 탐구하는 과학과, 도덕적 자율을 자각하는 실천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세계를 구분하고 존중할 때, 탐구에서는 겸허해지고 실천에서는 단호해질 수 있다. 이성의 두 얼굴이 한 인간 안에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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