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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경험과 직관의 지혜

by 신아르케

니시다 기타로의 『선의 연구』를 읽으며, 나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단어 하나를 다시 떠올렸다. 순수경험(純粹經驗).
그는 인간이 ‘나’라는 의식을 갖기 이전, 세상과 나의 경계가 사라진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를 이렇게 불렀다.
이때 인간은 판단하지도, 해석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 순수한 인식의 순간이야말로 진리에 가장 가까운 자리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일상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무엇을 먹을지, 어떤 길로 갈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삶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감각적인 느낌,
그 ‘설명되지 않는 확신’이 시간이 지나 숙고한 결과와 놀랍도록 일치할 때가 많다.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조금 더 분석해야지. 근거를 찾아야지. 실수하면 안 되지.”
그러나 그 순간, 마음의 파도는 이미 일렁이고 있다.
그 위에서 머뭇거릴수록 물결은 흐려지고, 방향을 잃는다.
결국 나중에 깨닫는다.
처음에 느꼈던 그 직관의 한 점이 가장 정확했다는 것을.

물론 모든 직관이 옳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직관이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오랜 경험이 몸에 새겨져 작동하는 무의식의 지혜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소방관이 화재 현장에서 즉시 탈출로를 판단하고,
외과의가 한눈에 위험 부위를 찾아내는 것처럼,
숙련된 사람의 직관은 오랜 피드백 속에서 빚어진 신속한 지성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지성을 스스로 의심으로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결심했다.
“분석 이전의 감각을 조금 더 신뢰해 보자.”
순간 떠오른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배우면 된다.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살아 있는 판단력이다.
직관은 결코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성이 완전히 성숙했을 때 되돌아가 닿는 가장 맑은 자리다.
니시다가 말한 그 순수경험의 상태와 통한다.

이후 나는 결정을 내릴 때 한 가지 습관을 들였다.
먼저 호흡을 고르고, 언어가 붙기 전의 감각을 잠시 바라본다.
그다음, 그 감각을 조용히 문장으로 옮긴다.
“지금 내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 한 문장을 적는 순간, 이미 답이 거기 있다.

직관은 나침반이고, 이성은 지도를 그리는 도구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길을 잃는다.
직관으로 방향을 잡고, 이성으로 길을 확인할 때,
삶은 빠르지만 흔들리지 않는 리듬을 얻는다.

순수경험은 어떤 철학자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하루에도 수없이 오가며 체험하는,
순간의 진실이다.
그 짧은 순간을 믿고, 두려움 대신 신뢰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요즘 배우고 있는 삶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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