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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버크가 던지는 경고와 오늘의 시민

by 신아르케

나는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며 개혁을 지향하는 편이다. 사회의 구조를 바꾸고, 더 나은 질서를 향해 전진하는 일에 늘 가치와 희망을 두어 왔다. 그래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은 나에게 낯설고, 때로는 거슬리는 책이었다. 그러나 이 고전을 끝까지 읽고 난 뒤, 나는 그가 던진 질문을 정직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변화란 무엇인가?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버크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자유, 평등, 이성이 고귀한 이상을 품고 있었음에도, 현실에서는 오히려 사회를 혼란과 폭력으로 몰고 갔다고 보았다. 혁명가들은 왕과 귀족, 교회 권력의 부패를 척결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했지만, 그 과정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 주도했다. 버크의 진단은 명확했다. 인간은 완전히 선하거나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욕망과 충동, 그리고 불완전성이 섞여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불완전성을 제어하는 장치가 바로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전통·관습·종교·향촌 공동체의 규범이다.

버크에 따르면, 인간은 개인 차원에서는 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군중이 되었을 때는 얼마든지 폭력과 복수의 열기를 합리화할 수 있다. 그는 “이상”이라는 이름 아래 세대 간의 약속과 역사적 축적물인 전통을 한순간에 폐기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 거듭 경고했다. 전통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침전된 지혜이며, 실패와 성공을 모두 통과한 집단 학습의 결과라는 것이다.

버크의 보수주의는 “변화를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변화, 법과 제도 위에서 이루어지는 개혁을 긍정했다. 다만, 전통의 토대 없이 “완벽한 사회를 즉시 만들 수 있다”는 낙관적 혁명론이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는 순간, 진보와 보수는 대립이 아니라 서로를 견제하는 두 개의 원리가 된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와 오늘의 한국 사회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국민성도, 사회적 성숙도도, 교육의 수준도 다르다. 나는 한국의 시민들이 보여준 정치적 선택과 집단 지성을 신뢰한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 무질서와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 법적 절차를 통해 변화를 이루어내려는 시민적 성숙을 여러 차례 목격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크의 성찰은 여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민주사회는 감정의 파도만으로 운영될 수 없으며,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보복과 폭력 역시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개혁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법적 절차와 제도적 장치를 거쳐 이루어져야 하며, 전통 속에서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는 지적 절제와 도덕적 침착함이 필요하다.

전통은 결코 시대착오적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세월 동안 쌓인 지혜의 축적이며, 세대를 잇는 조용한 약속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삶은 이전 세대가 지켜온 질서와 규범, 그리고 수많은 실패와 성찰의 결과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숭배할 필요는 없지만, 가볍게 폐기해서도 안 된다. 옳은 것은 계승하고, 형식만 남은 것은 개혁하며, 그 정신은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것, 이것이 성숙한 개혁의 모습이다.

역설적으로, 개혁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창조적 시민일수록, 버크의 사상을 한 번쯤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변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는 열정뿐 아니라 절제, 이상뿐 아니라 근거, 속도뿐 아니라 지속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는 서로를 부정하는 사상이 아니라,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할 두 개의 축이다.

버크의 고전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개혁을 원한다면, 먼저 스스로를 경계하라.”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꿈꾼다면, 세대의 시간이 만든 질서를 존중하라.”

나는 이 문장을 마음에 새긴다. 급진적 변화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전통과 개혁의 긴장 속에서 지혜를 찾는 시민이야말로 민주사회를 견고히 세울 수 있다. 진정한 개혁은 파괴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질서를 구축하는 창조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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