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만약 인간에게 감정이 전혀 없고, 차가운 이성만 남아 있다면 삶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
삶이 힘겹다고 느껴지는 이유 중 많은 부분이 감정에 의해 흔들리는 판단과 해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기분 때문이다’, ‘섭섭했기 때문이다’, ‘왠지 마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와 같은 말들은 우리의 결정이 얼마나 감정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낸다.
그런데 최근의 뇌과학 연구는 정반대의 사실을 알려준다. 감정 없이 이성만으로는 우리는 제대로 된 판단조차 내릴 수 없다.
감정 중추가 손상된 환자들은 사고 능력은 정상이지만, 일상의 사소한 결정을 내리는 데 극심한 어려움을 겪는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조차 수십 분을 맴돌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이성은 계산을 할 수 있지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끌어주는 방향성은 감정이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잘 들여다보면, 거의 모든 판단은 감정에 기반하여 직관적으로 이루어진다.
감정 기반 판단 체계가 없다면, 우리는 매 선택마다 가능한 모든 기회비용을 계산해야 하고, 그 과정은 끝없이 복잡해질 것이다.
메뉴 하나 고르는데 한 시간이 걸리는 삶, 그것이 바로 감정이 삭제된 인간의 모습이다.
물론 감정에 의존한 판단은 편견으로 흐르기도 하고, 자기합리화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솔직하게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판단은 대부분 감정과 호불호에 기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산보다 바다가 좋은지, 그 근거를 끝까지 추적해 보아도 결국에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바다를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매 순간 감정에 기반하여 사건을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삶의 방식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성찰이라고 부른다.
성찰은 즉각적인 감정 반응을 그대로 믿지 않고, 충분한 시간 동안 자신의 판단과 해석을 다시 평가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격한 감정에 휘둘려 판단을 내릴지라도, 시간이 지나 감정의 소용돌이가 잦아들면 이성이 개입할 틈이 생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내 판단에 오류는 없었는지, 윤리적·도덕적 기준을 나 자신에게도 공정하게 적용했는지 차분하게 되돌아보게 된다.
이 과정은 단순한 생각의 반복이 아니라, 자신의 사고를 다시 바라보는 ‘메타인지적 사고’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깊은 사고는 그냥 생겨나지 않는다.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떼어내어 지난 일들을 돌아보는 성찰의 루틴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산책을 하며 생각을 가다듬고, 어떤 사람은 사우나나 조용한 공간에 머물며 스스로와 대화를 나눈다.
영화 속 기업 총수들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별장에 머물거나, 철학자 칸트가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했던 이유도 결국 같다.
고요와 고독은 인간에게 사유의 공간을 제공하고, 감정의 폭풍이 지나간 뒤의 세계를 바라볼 힘을 준다.
감정에 기반한 판단은 우리의 생존과 삶의 효율성 측면에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편견과 자기합리화로 흐르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은 이성과 성찰이며,
이 둘이 만날 때 우리는 보다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결국 인간의 판단은 감정이 시작하고, 성찰이 완성한다.
감정은 방향을 제시하고, 성찰은 그 길이 옳은지 다시 확인한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조금씩 더 성숙해지고, 조금씩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 전체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스스로를 단련해 나가는 하나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