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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제 밥 있어, 많이

by 마른틈

“언제 올라갈까요?”

“음… 바빠. 다음에”




“누나 이번 주에 놀러 가도 돼요?”

“나 약속 있는데”




“마라톤 뛰실래요?”


허, 미친놈이 뭔 놈의 약속을 마라톤으로 잡재.

근데 나쁘지 않을지도…?


“그럴까?”




그러니까 이 녀석 하고의 인연을 설명하자면 그 역사가 깊다.


“야, 우리 안 지 몇 년 됐지? 너 몇 살 때였어?”

“인생이 피폐해지기 시작했을 때였으니까… 5년 전?”

“와, 진짜 말하는 거 봐… 극혐”


그래, 이 녀석 하고 나하고는 그 뿌리부터가 안 맞다. 나는 MBTI나 혈액형 같은 걸 맹신하지는 않지만, 우리 둘 다 같은 ISTP다. 원래 잇팁들끼리는 서로를 본능적으로 싫어한다지. 그래서 나도 이 녀석도 서로를 극혐 한다. 일종의 동족 혐오랄까… 차이가 있다면 나는 녀석보다 몇 해 더 먹은 덕에 그 혐오를 대놓고 드러낼 수 있다는 것…? 녀석은 차마 대놓고 티를 내진 못하니 그 불만을 눈빛으로만 쏘아댈 뿐이다. 하하, 네가 뭐 어쩔 건데.


하여간에 녀석과 처음 만난 건 남편과 함께 시간이나 때우던 게임에서였다. 그는 우리 캐릭터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초보였다. 남편과 나는 게임을 딱히 재미있게 즐기는 편도 아니었으니 금세 나가떨어질 줄 알았거늘, 그 녀석은 인내심 좋게 6개월 넘게 우리 곁을 붙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인천에 놀러 왔다기에 밥이나 사주겠다 했더니 다이어트 중이던 나를 위아래로 훑고는 “그게 뺀 거예요?” 같은 망발이나 뱉지 않겠나. 그날 이후 그는 내게 머리를 얻어터질 놈이 되고 말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그를 싫어하는 이유는 아마 사회화 이전의 내 모습이 딱 저따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종의 자기 수치랄까. 그래서 얄밉지만, 또 마냥 밉지도 않다.

우리 집은 손님을 자주 들이진 않지만, 한번 맞을 땐 제대로 맞는다. 며칠에 걸쳐 대청소를 하고 세 마리의 고양이를 씻긴다. 고양이는 목욕 직후 털이 많이 날리니 일주일 전쯤 미리 씻겨 매일 빗질해야 한다. 일종의 손님맞이 꽃단장이랄까. 사실 이 일련의 과정들이 귀찮아서 손님맞이를 꺼리는 것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나. 얄밉긴 해도 어쨌든 그도 손님인 것을.


“저 자고 가도 돼요?”

“방 따로 잡아. 내가 널 뭘 믿고 우리 집에 재워”

“와 매정해”

“막말로 네가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르잖아. 자다가 네가 막 눈 회까닥 해서 나랑 오빠 죽이면 어떡해? 목숨은 한 개뿐인걸”


참고로 그땐 무차별 흉기 난동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던 때였다. 눈 하나 깜짝 않고 못된 말이나 지껄이는 나나, 저딴 말을 듣고도 기어이 버티다 자고 가는 녀석이나.


“너… 피죽도 못 얻어먹고 다녀…?”


다음날, 해장국에 밥이 모자라다며 밥솥에서 고봉밥을 세 공기나 퍼먹던 그날부터, 그는 우리 집의 손님이 아닌 하숙생이 되어버렸다. 그 하숙생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매번 “밥 있어요?”를 묻는다.




우리의 마라톤 팀명은 [너 이제 밥 없어]였다. 녀석은 여전히 버릇이 없었고, 그럴 때면 나는 부들부들 째려보며 “너… 이제 밥 없어…!”라 말하곤 했으므로. 우리는 10km 가족 코스를 신청했다. 1시간 30분 이내로 완주해야 했다.


“오, 이제 하숙생에서 가족으로 승진한 거예요?”

“푸하하 별 걸 다 좋아하네. 그냥 신청료 싸서 한 거야”




내가 달리기 시작한 지는 이제 1년이 조금 안 됐다. 조금 게으른 나는 체력이 되고 비가 오지 않는 어느 날에만 뛸 수 있었으니 그리 많은 날은 아니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마라톤에 신청했지마는 그건 사실 나에게 정말 큰 도전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달리기에 젬병이었다. 초등학생 내내 체력장 오래 달리기엔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심장이 아프다고 했다. 비록 가슴에 호스 하나 꽂지 않았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닌 적도 없었지만,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착한 아이였다. 엄마는 매년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우리 애는 심장이 아파 무리하면 안 돼요”라고 말했으니 그것을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어느 날 무언가 이상하다고 여긴 것이 고학년쯤이었으니, 진실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태어날 때 나는 모태에서 올바른 자세로 자리하지 못해, 뒤틀린 발목을 가진 채 세상에 나왔다. 엄마는 내 다리를 고치기 위해 서울의 대학 병원을 모조리 찾아다녔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는 연약하고 물렁한 아기의 뼈가 최대한 제자리를 찾기만을, 그저 그 앞날이 장애 없이 평범하기만을 바라며 손목이 망가질 때까지 내 다리를 주물렀다. 그 정성이 갸륵하였는지 그 다리 모양은 점차 정상으로, 평범의 범주 속으로 돌아왔다. 뾰족한 수가 없다던 그 병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기적’이라 말했다.

물론 이후에도 나는 팔자걸음을 고치기 위해 엄마 손을 잡고 오래도록 걷는 연습을 해야 했다. 억지로 맞춰진 뼈는 유약해서 내 다리는 작은 충격에도 쉽게 자지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바라던 대로, 그리고 나 역시 바라던 대로, 평범하게 걸을 수 있었다. 뛰겠다는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엄마가 “심장이 아프다”고 한 건 혹시라도 내가 ‘장애’라는 낙인을 감당할까 걱정했던 마음이었다. 그건 선천적인 문제도, 유전적인 질환도 아니었지만, 그 복잡한 사정을 설명하기엔 퍽 고단한 일이었으니까. 나는 그 진실을 알고 나서도 1년은 더 뛰지 않았다. 그리곤 스탠드에 앉아 달리는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문득 외롭다고 생각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엄마는 학교에 전화해 주느냐고 물었고,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아니”라 대답했다.

체육을 싫어하는 여자애들이면 으레 그렇듯, ‘누가 꼴등일지’를 겨뤄댔다. 서로 나보다 못 뛰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아니 내가 진짜 못 뛴다며. 그러면 “우리 같이 꼴등 하자”고. 그 속에 섞인 나는 조금 안심했지만, 언제나 꼴등은 나였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한참 전에 다 뛰어 들어간 아이들은 스탠드에 앉아 하염없이 나를 기다렸다. 그건 정말 몹시, 눈물이 날 만큼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평생 달리기와 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만약 좀비나 재난이 터지면 제일 먼저 죽겠지. 악착같이 살아남느니 그냥 3초 컷으로 끝나는 게 낫다고 믿었다. 그런 내가 이제 와 달리고 있다니 참으로 어이없고 우스운 일이다. 그것도 이제는 달리면 안 될 몸으로. 비록 수시로 튀는 맥박에 귀압과 안압이 솟구칠 때면 주저앉아 한계에 부딪힌 마음을 도닥이느라 착잡하지만,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바뀌는 저녁 하늘의 색채를 바라보면 그 마음에도 물빛이 번진다.


이제 주변 사람들은 내가 러닝을 한다는 것을 다 안다. 그런 것치곤 달린 지 거의 1년이나 됐어도 여전히 잘 뛰지 못한다. 게다가 아주 천천히 뛰어야만 오래갈 수 있다. 조금만 속도를 내도 맥박이 치솟아 곧장 주저앉는다. 누군가는 내 속도를 보며 웃지만, 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도 내가 웃기거든. 주치의 선생님은 그딴 식으로 운동하느니 차라리 하지 말라 했다. 심장합병증 오기 딱 좋다며. 하지만 나는 달리면서 종종 생각한다. 이렇게 달리다 죽는다면, 그것도 호상이 아닐까 하는. 조금 평범하지 못한 생각일 테니 속으로 삼키지만, 알다시피 나는 의사 말을 잘 듣는 사람은 아니다.




부러 신경 써서 관리한 체력이었으나, 결국엔 실패하지 않았겠나. 나는 이 계절을 참 좋아하지만, 이 맥 없는 몸뚱이는 가을이면 유난히 무력해져선 면역관리가 참 어려워진다. 착잡한 마음으로 항생제나 주워 먹고 있는 이 꼴이 피로하고 짜증스럽다.


“나 완주 못할 것 같아… 완주 못하면 어떡하지…?”


어쩐지 자꾸만 떨어지는 자신감을 꾹 눌러 삼키며, 매일 체중계 위에 오른다. 그 숫자가 근래 들어 가장 낮다. 흠… 이건 좀 문제다. 실낱같은 체력이라도 끌어모으기 위해, 없는 약속까지 만들어 아득바득 챙겨 먹는다. 점심 약속을 마친 뒤 집에 돌아오니 녀석이 이미 내 컴퓨터 앞을 차지하고 앉아 게임이나 즐기고 있다.


“야, 너는 누나가 왔는데 한 번을 안 돌아보네?”

“예…(여전히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고) 지금 한타 중이라서요”

“허… 네가 잠깐 시선 돌린다고 그 판이 달라질 만큼의 영향력이 너한테 있다고 생각해?”

“아, 나 원딜(팀의 딜러 역할)이야ㅡ!”

“어쩌라고, 이 건방진 새끼가. 넌 진짜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여전한 우리의 인사법이었다. 녀석을 데리고 고깃집서 간만에 소와 돼지로 기름칠을 하며 말을 꺼낸다.


“미리 말할 게 있는데, 나는 너희가 보기에 우스워 보일 정도로 느리게 뛸 거야. 1시간 30분 이내에 완주 못할 수도 있어. 맥박이 튈까 봐 혹시 몰라서 약도 추가 처방받아왔어. 그래도 장담은 못 해. 그리고 뛰는 중에 나한테 말 걸지 마. 체력 떨어져서 한마디도 안 할 거니까. 나한테 느리다고 불평할 거면 따로 뛰어. 내가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너희가 싫어서가 아니고 내 몸 상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 그럼에도 가능하면 목표가 완주니까 미리 양해를 구할게.”


남편은 나와 같이 뛰겠다며 녀석에게 먼저 가라 말한다. 녀석은 초반엔 같이 뛰다 상황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답한다. 맛있게 먹고 배를 두드리며 나오는데, 하숙생 주제에 녀석이 갑자기 결제하겠다며 카드를 꺼내드는 것이 아닌가. 다급하게 만류하자 그가 말한다.


“저 취직했어요. 취직 턱”

“헐. 대박. 야 고마우니까 오늘은 더 안 괴롭힐게.”

“오늘 이제 세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착해지는 비용 한번 비싸네…”


허나 불행히도 다음날, 그러니까 마라톤 당일 새벽. 남편은 열이 오르고 기관지 통증을 호소했다. 그 익숙한 증상에 불길한 기억이 스친다.


“당장 코로나 키트 꺼내서 검사해 봐!!”


다행히 결과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굳이 아픈 몸을 이끌고 무리할 필요는 없었기에, 결국 마라톤은 나와 녀석만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는 떠나는 나를 향해 몇 번이고 거듭해서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힘들면 그냥 주저앉아있다가 구급차 타고 돌아와. 어차피 시간 지나면 도로 통제 풀린다니까 알겠지?”


어린아이를 보듯 하는 그의 눈을 마주하며, 나는 조금 자신 없는 대답만을 남긴 채 집을 나섰다. 실은 조금 고단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 밤은 나에게 무정해 단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새벽부터 하늘은 흐리고 쌀쌀했다. 주치의가 당부한 약의 최대용량(3알)과 혹시 모를 저혈당에 대비해 초콜릿을 챙겼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참여해야 하나…’ 싶은 무력감이 밀려왔다. 평화롭고 안전한 집에 있고 싶다는 겁쟁이 같은 생각도 잠시 했던 것 같다.

허나 막상 도착해 몸을 푸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니 세상엔 이토록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습게도 10월의 가을 하늘이, 오전 여덟 시에 여명처럼 밝아오는 그 순간이 어찌 아름다운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건대, 나는 완주에 성공했다.


물론 여러 번의 고비가 있었다. 2km 지점이 약간 지난 시점부터 급격히 느껴지는 가슴 통증에 손을 벌벌 떨며 첫 번째 약을 먹어야 했다.(그때 녀석은 “도핑 테스트 걸리면 어떡하죠?”라는 헛소리를 했다) 그 무렵부터 반환점을 돈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더니, 점점 많아져서 심리적 압박이 밀려왔다. 그걸 본 녀석은 “반환점까지만 함께 하고 완주하러 가겠다.”고 말했고, 나는 그러라고 했다. 3km 지점에서는 너무 힘들어 멈추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이 막혀 도저히 계속 뛸 수 없었다.

시간을 얼추 계산해 보니 1시간 30분 안에 8km 정도나 나올까 싶었다. 속상했지만 포기하지 않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하고 다시 달렸다. 아까 먹은 약효가 듣는지 호흡이 조금 안정됐다. 물론 미련하게 멈춰버린 몸뚱이 탓에 다리가 천근만근이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반환점을 돌았고, 그 녀석이 내게 물을 넘겨주며 떠났다. (떠나면서 내 힙색의 지퍼도 부수고 떠났다)


사실 맞지도 않을 속도로 러닝메이트를 자처하던(그 녀석은 내내 뛰지도 걷지도 못하며 인터벌 러닝이나 하며 나를 기다렸다) 녀석이 사라지니 고단함이 배가됐다. 금방이라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이만큼만 해도 충분하잖아’, ‘평소보단 훨씬 오래, 많이 뛰었잖아.’, ‘나는 아프잖아, 무리하지 말랬잖아.’ 얼마쯤은 달콤한 속삭임에 기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다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 오늘 밤 ‘그때 조금만 더 뛸걸…’이라며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 기억에 다음 도전 앞에서도 “나는 그거 못해”라며 주춤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저 손을 꽉 쥐었다. 손톱자국이 하얗게 남았다. 그때 마침 내내 흐리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늘 비를 잔뜩 맞고 싶은 사람이었다. 다음날 손쓸 수 없이 앓아누워도 좋으니, 비 맞은 생쥐꼴이 되도록 미친 듯이 비를 맞고 싶었다. 허나 ‘정상’의 틀에 집착하는 나는 남들의 시선 따위를 꽤나 의식하는 인간이라, 이렇게 ‘마라톤 참여 중에 비가 와서 어쩔 수 없이 비를 맞게 된’ 상황이야말로 나에게 굉장히 기꺼운 상황이지 않겠나. 그리하여 나는 갑자기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비록 숨은 차고,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빗방울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보면, 빗방울이 닿아 스러지는 수면의 파동이 마구 일렁였다. 퍽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달리는데 6km 지점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너… 왜… 안 가고… 헉… 여깄 어…?”

“마음에 걸려서, 지금 속도면 완주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힘내봐요”


정말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생각지도 못했던 호의에 나는 꽤 감동했다. 이 녀석, 쓸모없고 재수없고 이기적인 데다, 내가 사회화되기 이전 버전인 ISTP 주제에…. 어디 감히 누나를 감동시켜…?

허나 유감스럽게도 7km 이후 두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주치의 선생님이 3개까지 먹으라 했다고 정말 다 채워 먹을 생각은 없었기에, 이제 마지막이었다.


“야, 너 이제 가. 더 늦으면 완주 힘들어. 아까 거기서 기다려준 것만으로도 너는 할 만큼 했어.”


그를 보내고, 나는 늘어진 속도로 계속 달렸다. 제시간 안에 들어가겠다는 희망은 이미 접은 지 오래였다.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으로 젖은 몸이 점점 으슬으슬했다. 문득 열 손가락 끝이 따끔거렸다. 초콜릿을 꺼내 씹으며 그저 계속 달렸다. 시야가 깜빡이며, 이제는 정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즈음. 눈앞에 START라는 글자가 보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다해 달렸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녀석의 얼굴을 스치며, 나는 피니시 라인을 밟았다.


기록 1시간 28분 22초. 시간 내 완주였다.


나는 문득 북받치는 설움에 그만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말았는데, 후에 듣기를 녀석은 내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줄 알고 대기 중인 의료팀에 달려가야 하는가 하고 안절부절못했다고 한다.




돌아와 나의 완주 소식을 남편에게 전하니 정말 깜짝 놀라했다.


“솔직히 말해봐. 나 완주 못할 줄 알았지”

“응”

“사실 나도.”


비를 잔뜩 맞은 우리의 하숙생과 나는 몸을 따뜻이 녹이고 남편과 함께 뜨뜻한 국물로 배를 채웠다.


“다음에도 마라톤 할 거예요?”

“10km는 안 할래… 이제 내 주제를 잘 알았어…”

아예 안 한 다곤 안 하네, 그래도”

“……”

“저기 금천에 5km짜리 달리면 수육이랑 막걸리 주는 수육런 있다던데 다음에 고?”

“미친 인간아 ㅋㅋ 근데 재미는 있겠다. …푸엣취!”


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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