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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만남과 헤어짐에 대하여.

by 마른틈

네가 그딴 식이니까 네 곁에 아무도 남지 않는 거야”


칼날 같은 바람이 자비 없이 스치던, 가을보단 겨울에 가까운 그 어느 날에 들었던 말이었다. 그치가 내게 소중했냐 묻는다면 글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기억에 남을 만큼 강렬한 사람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

하지만 소중하지도, 강렬하지도 않았을 지나간 인연 주제에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수년이 지나도록 뇌리에 단단히 박히고 말았다. 쓸쓸한 바람이 부는 이 계절이면 문득 들려오는 그 말에 예고 없이 마음이 서늘하게 식는다. 어떤 의도였든 간에 한 인간의 기억 속에 남고 싶었다면 대단히 성공한 셈이다.


나는 외롭다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부터 혼자 자랐으니, 그 삶이 퍽 공허하고 고단했다. 뱉어내는 말에는 절제가 없어 칼과 가시가 되어 사방을 찔렀다. 어디까지가 넘어선 안 될 경계선인지 가르쳐줄 어른은 존재하지 않았다. 예쁜 말을 골라내고 적당한 선을 지키며 상대방의 기분을 살필 줄 아는 예의 바른 인간들은 재수가 없었다. 그것이 곧 사랑받고 자랐음을 방증하는 것일 테니.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동경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닮을 수 없을 그 태도를 닮고 싶어서 재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라.

그러니 인정하기 싫지만, 애정결핍이라는 단어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한때의 나는 안에서 채울 수 없는 애정을 밖에서 채우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별 볼 일 없는 인간관계에 시간과 돈을 쏟았고, 진심과 이해보단 잦은 연락과 만남이 관계의 본질이라 믿었다. 타인의 평가에 필요 이상으로 휘청이면서도, 그런 못난 모습을 들키기 싫어 SNS속에서 나를 포장해 전시했다.


다만 나는 운이 조금 좋았다. 얼마쯤 못돼 쳐먹고 허울뿐인 나를 걷어내어 “그랬구나”,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앞으로 안 그러면 돼”, “혹시 또 그러면 어때, 인간은 원래 실수하면서 살아가는 거야. 반성할 줄 알면 된 거야”라며 어깨를 토닥여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다정은 내 가시를 하나씩 무디게 하고, 세상을 향해 꽉 쥐고 있던 주먹의 새끼손가락부터 천천히 끌러냈다. 그 온정은 참으로 위대해서, 원망으로 가득했던 마음마저 한없이 무르게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때때로 공허를 느끼지만, 이제는 타인보단 나를 더 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알게 되었고, 사랑하는 이에게는 넘치는 애정을 건넬 줄 알게 되었다. 애석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애정에 실망하지 않는 법도 배웠다. 나는 이것을 알기까지 삼십여 년이 걸렸다.

어릴 적 어느 때에는 돌아오지 않는 애정이 불안해 손톱을 괴롭히고, 팔뚝을 쥐어뜯으며 흉을 남겼다. 버려질 것이라는 두려움. 혼자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는 사람을 미치게 했다. 불안정한 나를 드러내면 누군가가 나를 더 들여다봐 주지 않을까, 불쌍히 여겨줄지 몰라. 그 얄궂은 기대에 매달리던 꼴이 참으로 비참했다.

허나 이제 나는 헤어짐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모든 이별의 순간이 그랬으니 나는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이기적이고 못된 나는 참고 견디기를 반복하다가 끝내 그 관계가 나를 소모시키는 지점에 다다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나의 모든 관계는 대체로 그래왔다. 그것이 상대방에겐 다소 갑작스러워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그전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신호를 보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관계를 끊어내는 일이 마냥 홀가분할 수는 없다. 본디 미련이 넘쳐흐르는 나는, 친구든 연인이든 누군가와 헤어지는 일이 늘 어렵고 속상하다. 지독한 자기 검열의 습관 탓에 짧으면 몇 달, 길면 몇 년 동안 꿈에서 그 장면을 반복하며 괴로워하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멍청하고 미련한 나만의 사정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제 나를 지속해서 소모시키는 관계와 오래 이어가고 싶지 않다. 살아오며 받은 애정의 총량이 적어서인지 나눠줄 수 있는 애정의 양도 한정적인 것 같다. 그래서 진심으로 나를 아껴주는 사람에게만 그 애정을 주고 싶다. 마냥 애정을 갈구하던 때의 나는 상대에게 맞추기에 급급해서 이런 줏대가 없었을 테니, 장족의 발전이 따로 없겠다.


이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이별이 무력한 내게 가져올 것들. 긍정적인 것들. 부정적인 것들. 한때에는 마음을 충만하게 했으나 이제는 그저 가슴을 섧게 하는 것들. 잊는 일은 어렵고, 잊히는 일은 서럽다.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누군가의 마음속을 헤집고 덧내며 살아가는 존재다.


“네가 그딴 식이니 네 곁에 아무도 남지 않는 거”라던 말을 여태 잊을 수 없는 이유는 그 가을밤의 바람이 유난히 서늘해서도 아니고, 일순 멈췄던 호흡 때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혓바닥을 칼처럼 휘두르던 고작 너 따위에게 그런 말을 듣고도,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하는 내가 창피해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졌다. 해서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도 지독한 자기 검열 따위나 거치는 무지몽매한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당신을, 모든 만남을 사랑하기로 했다. 그 이별까지 사랑하기는 아직 어렵지만, 떠나간 당신이 내게 남긴 감동을 간직하고 감사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로, 그리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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