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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한파와 붕어빵

by 마른틈

새로 근무하게 된 회사가 붕세권이다. 이름하여 붕어빵세권.

붕어빵을 내 돈 주고 사 먹은 게 언제였냐 하면, 사실 기억이 안 난다. 까마득하게 오래전 일인 것 같다. 아니, 애초에 사 먹어본 적이 있긴 한가? 나는 보통 빵을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개중에 모카 향이 풀풀 풍기거나, 가끔 담백한 식감이 무척이나 당기거나, 향긋한 바질 같은 것이 얹어진 것들이 아니라면 그다지 싶은 거지. 그러니 내가 먹어본 붕어빵이라곤, 누군가가 사 와서 “먹을래?”하며 나눠주면 고맙다며 한두 개 집어먹는 것뿐. 사실 그조차도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나는 원래 단맛도 싫어했으니까 단팥이 들어간 붕어빵도 싫어할 수밖에.
나이가 들며 식성이 변하는 건지, 취향이 변하는 건지, 성격이 변하는 건지. 혹은 전부인지. 나는 많이 변해가고 있다. 질색하며 평생을 먹지 않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맛있게 먹히고 주기적으로 당긴다. 여전히 작고 귀여운 것들을 좋아하지만 때때로 아무것도 없는 미니멀한 상태를 아름답다고 느낀다. 살면서 절대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에 문득 손대보고 싶어진다. 그렇게 갑자기 도전정신이 불타오른다. 그러니 먹지 않던 붕어빵도 때때로 집어 들면, 차가운 바람에 얼어있던 손을 데우는 온기가 입안에서부터 뱃속을 덥혀주면, 무방비한 마음까지 뭉근해지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평생에 싫던 붕어빵도 좋아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붕어빵을 머리부터 먹느냐 꼬리부터 먹느냐를 가지고 아웅다웅한다는데 나는 그런 호불호는 딱히 없는 것 같다. 그냥 손에 잡히는 쪽으로 베어 물고 나면 그게 머리인지 꼬리인지 알게 뭐람….
생각해 보면 그리 줏대 없이 구는 꼴이 꼭 나 같다. 이일, 저일, 네 일, 우리 일까지 다 도맡고 내내 시간에 쫓기다가 내가 머리부터 먹었는지 꼬리부터 먹었는지 기억도 못 하는, 꽤나 우매하고 멍청한 타입. 이것도 저것도 다 내 것처럼 구는 욕심 많은 내게 주변인들은 보통 “몸이 다섯 개쯤은 있어야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아니야. 사실 능력도 부족한데 머리도 모자라서 몸만 고생하다가 아무것도 못 해.”라고 대답한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자기 객관화를 아주 잘한다.
나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데, 한가할 땐 세상에 하등 쓸모없는 인간처럼 아무 일도 없다가 바쁠 때는 세상 모든 바쁜 일이 다 몰아닥친다. 지금도 그렇다. 기말고사랑 과제, 시즌에만 바빠지는 주문 건들, 협업 매거진 출판과 공모전 준비, 개인적으로 쓰는 글, 그 외에도 이슈 몇 가지… 이런 것들이 짧으면 5일, 길어도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상태로 밀려오고 있는데 나는 지금 붕어빵 글이나 쓰고 있다. 그리고 오늘이 출근 이틀 차였다. 사실 새 직장에 적응하는 것만도 꽤 벅차다.


끝없이 쌓인 일들을 세 알리며 “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차라리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바쁜 일정에 조금은 감사하고 있다. 문득문득 차오르는 슬픔에 가슴이 꽉꽉 들이 막히는 요즘이지만, 마치 네가 지금 슬플 틈이 어디 있냐며 들들 볶이는 기분이다. 이에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지금 말고 좀 한가해지면 기회를 봐서 슬퍼하라”는 누군가의 말에 무방비하게 웃어버렸다.
그렇게 능력도 부족하고 머리도 모자라서 몸만 혹사하는 주제에 어찌어찌 큼지막한 일 하나는 끝내서 오늘 밤은 조금 뿌듯하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이딴 붕어빵 글이나 쓰고 있으니까, 사실 조금 자축하는 거다.

솔직히 인정한다. 나는 절박하게 살지 않았다. 어느 한때는 누구보다 절박한 마음으로 살아왔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안주했다. 그간 누리지 못한 평안과 안정이라는 달콤한 꿀에 기댔다. 그게 언제까지고 내 것일 줄 알았다. 그러니 나는 또 멍청했다.
요즘의 나는 무엇이든 잘해야 한다며 집착에 가깝게 전력으로 임한다. 다짐보단 강박에 가까운 수준이지만, 어떤 것 하나 어긋날 수 없다. 나는 그래야 한다. 평안과 안정에 기대기 싫어졌으므로. 다시는 그 거짓된 평안에 속지 않기로 결심했으니.
아, 나는 사실 이런 마음이 너무 싫었다. 날 때부터 가진 것이 많고 받을 것이 많아 한 번, 아니 몇 번의 실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들. 조금은 무너져도 받쳐줄 든든한 ‘뒤’가 있는 사람들. 그들이 너무 싫었다. 나는 한 번의 실수에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까 봐 휘청이는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언제나 안간힘을 써왔는데. 나는 발을 헛디뎌 주저앉으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내게 안전망 따위는 존재치 않으니 늘 한 개뿐인 목숨처럼 살아야만 했는데. 재수 없는 인간들 같으니.

물론 그들은 내게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찌질한 인간이라 그렇다. 나도 안다.
그러니까 이렇게 뒤가 없을 것처럼 전력으로 구는 마음은 가능하면 잊고 살고 싶었다. 마치 원래부터 몰랐던 것처럼 그리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망각은 결국 나를 상처 입히고 또 상처 입혔다. 그러니 별수 없는 거다. 내가 또다시 이생의 모든 것에 전력으로 굴게 된 것은, 그 어느 것 하나 어긋날 수는 없는 일이다. 실패를 걱정할 수도 없다. 나는 그저 무조건, 잘해야 한다.

회사가 붕세권이면 뭐 하나. 정작 퇴근하면 붕어빵 사장님이 퇴근하고 안 계신다. 그러니 이 처량한 꼴도 참 나 같다고 여긴다. 그래,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더라. 그래도 어쩌겠나. 나도 퇴근하는데 붕어빵 사장님도 퇴근하셔야지. 그래 그게 맞지.
속이 답답하다. 이 지난한 마음을, 수많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저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만을 빈다. 나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정말 싫어하지만, 요즘처럼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란 적이 없다. 그저 이 모든 일들과 마음이 과거형이 되기만을 바란다. 언젠가 “그때 사실 내가 그랬었어”라고 말하는 내 얼굴엔 조금의 피로감이 묻어 나오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꽤 괜찮아. 나 잘 해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될 날이 오기만을 바라는 나날이다.

새로 출근한 회사의 퇴근길에는 멋들어진 은행나무길이 늘어서 있다. 첫 출근부터 시작된 한파가 가을이라 하기엔 퍽 무심하지만, 어둑해진 밤하늘을 수놓는 노란 은행잎은 분명 가을이다. 그 길을 지나 버스를 타면 곧장 노트북을 열어 밀린 무엇이든 쳐낸다. 나는 여전히 공사다망하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어야 하니까. 적어도 당분간의 계획은 그러하니까. 그렇게 뿌려둔 것들을 차근차근 수확할 날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 또한 가을이라 그렇다.


갑자기 집 근처에 붕어빵을 파는 곳이 생겼다. 정작 붕세권인 회사 앞에서는 살 수 없어 처량하다 여겼는데 의외의 수확이다. 이 또한 나 같다. 어찌어찌해내는 꼴이 그렇다.
그래 이렇게 어찌어찌해내다 보면 슬퍼할 틈도 없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시간이 흘러가겠지. 곡식이 익어 수확할 날처럼, 나의 모든 일들도 하나하나 자리를 잡아가겠지.

붕어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우선은 내일도 잘해보는 거로. 그렇게 쌓인 내일들이 그저 빨리 오기만을 바라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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