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최대한의 거리에서 최소한의 마음으로

by 마른틈

나는 한때 입이 더럽게 쌌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얼마만큼의 무게를 가진 줄도 모르고, 단순하여 가볍게 뱉고서는 며칠 후 그 사실조차 잊어버릴 만큼, 딱 그만큼 쌌다. 그 말들은 누군가 나에게만 조심스럽게 건네던 비밀이기도 했고, 조금은 건방져 함부로 재단하던 나의 시선이기도 했다. 다만 어느 날엔 차마 전하지 못할 지난한 마음이기도 했다.

그러니 무게를 모르고 달아난 말들이 끝내 어디에 닿았는지 알 수 없어 헤매다가, 때때로 돌아오는 업보에 찔리고 상처 입기 일쑤였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 무지몽매한 인간의 정당한 말로였으니 이제 와 그것이 억울하거나 슬프지는 않다. 인간은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로, 뼈아픈 실책을 인정하고 고쳐먹는다면 앞으로의 무지한 판단을 줄일 수 있다. 그리하면 얼마쯤의 상처와 비수는 아주 값싼 교육비일 테다.

나 역시 분명, 언젠가는 그런 종류의 멍청한 인간이었다. 다만 나는 때때로 분위기에 태워 보내던 말이라던가, 혹은 ‘우리만의 비밀’ 같이 효력도 없을 말로 그 신뢰를 공고히 하고자 하던 무지가 더 큰 불안을 가져온다는 걸 깨달아버린 것이다.

물론 당신들은 대부분 나의 마음과 비밀을 지켜주려 애써주었겠지만, 몰랐더라면 애초에 감당하지 않아도 됐을 노력이다. 또한 스스로 꺼내놓은 마음에 되레 당신을 의심하게 되어버린 나의 멍청함도 참으로 하릴없고 우습기 짝이 없 않겠나.


나는 사람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다. 허허실실 사람 좋은 척 구는 나를 보며 당신들은 내가 정이 많고 사람을 잘 믿는다 생각하겠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나는 늘 그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싶으나, 사실 언제든 당신이 나의 등에 칼을 꽂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에 얼마쯤은 대비가 되어야 마땅하거늘, 결국 닥쳐온 상황을 도저히 인정하기 싫어 상처 입는다. 아,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마음인가.

나는 그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마음이, 지독하도록 깊은 인간 불신이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그러니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네가 그 꼴이니 주변에 사람이 남아나지 않는 것”이라며 비수가 꽂히던 날에도, 그저 억울하게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끝내 결론지었다. 늘 황폐해 상처받은 마음을 돌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믿지 않으면서 믿고 싶은 마음은 가히 폭력적이다. 혹시 내일이라도 치가 이 비밀을 무기 삼아 나에게 휘두르면 어쩌지. 우리의 관계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수 있나. 천륜도 져버리는 이 무정한 세상에, 타인인 나와 당신이 과연 그럴 수 있나. 때로 무심했을 나에게 상처 입은 당신이 변심하는 건 종잇장을 구기듯 쉬운 일이 아닐까. 하여 나는 스스로가 내어준 약점 앞에서 벌벌 떨다 자멸하고, 곳곳에 생긴 생채기 같은 마음을 엉성하게 기워놓기 바빴다.

그러니 내가 입을 닫게 된 이유는 그 어떤 학문적인 깨달음이라든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따위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저 처절하도록 외로워 자멸하는 꼴이 지긋지긋하였을 뿐이다. 그 바탕에는 여전히 당신을 믿을 수 없는 모진 마음이 숨어있으니, 내가 얼마쯤 대단하거나 썩 괜찮은 인간이라 그런 것이 절대 아 것이다.


나 스스로가 입이 싸게 굴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말의 무게를 모르는 이들은 존재한다. 그들은 언제나 나에게 선물처럼 다가와 곰살맞게 굴다가, 어느 날엔 차마 쓰레기봉투에 다 담기지 못하고 튀어나온 휴지 조각과도 같을 마음으로 떠나간다. 하여 사랑해 마지않던 당신이 어느 날엔 참 실망스럽지 않겠나. 나는 사람에게 '실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정말 싫지만 말이다.

그렇다한들 나는 여전히 당신이 건넸던 무형의 가치들이 소중하다. 비록 그 마음을 떠나보내기로 결심하였더라도, 우리의 시간과 감정이 헛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당신이 조금은 밉지만, 그럼에도 한때 당신이 쥐여 준 마음이 나를 살아가게 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당신을 완전히 미워할 수는 없다. 다만 소박히 바라건대 당신 또한 그 어느 날 내가 건넸던 마음들이 사무친다면, 그리하여 가끔은 허전한 마음을 쓸어내리게 된다면 그 수많은 말의 무게를 잠시 헤아려주길 바란다.

끝내 당신을 미워할 수 없는 미련 속에서 당신이 그리 해 준다면, 우리의 관계는 최대한의 거리에서 최소한의 마음으로 존재했다 믿을 수 있을 테니까.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