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 9시까지 일이 없었다. 어제만 해도, 오늘 뭘 할까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더랬다. 책을 읽어야지 발표준비좀 해야지 영어공부 해야지 중국어 공부 해야지 중국 비자 받으러도 가야하는데 일단은 늦잠을 좀 자자. 하고 눈을 뜨니 7시반. 좀더 자자 하고 누웠다 눈을 뜨니 9시. 한국쪽 비자서류가 나한테 오는 바람에 일어나자마자 그 처리를 좀 하고, 누운 채 핸드폰을 펼쳤다.
딱히 그러지 않아도 될 짓을 했다. 이미 다 본 웹툰을 처음부터 다시 보기. <여자만화 구두> 예전에 볼 때도 느꼈지만, 이번에도 느낀 그 분노. 최연호는 정말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지만 분명 존재하는 쓰레기같은 놈. 나 역시 신지후같은 사람이었고, 신지후같은 연애를 했다. 혼자 하는 연애. 당신은 나를 정말로 사랑하나요? 묻고싶지만 물을 수 없고, 그녀를 질투하지만 질투할 수 없고. 그가 떠나갈까 봐. 최근에 잠시 나와 엮였던 그남자도 결국엔 최연호였다. 끝장을 보기 전에 내가 먼저 잘라버렸으니, 천만 다행이었지. 웹툰 마지막화를 다 보기 전에, 마음을 슥슥 쓸며 다행이야 다행이야, 하고 중얼거려보았다.
아침겸 점심을 만들어 먹고, 문득 생각이 나서 백투더퓨쳐를 좀 보기로 했다. 어제가 그 날이라지, 2015년 10월 21일. 영화속 삼십년 후 그날. 나이키 신발이 자동으로 슉슉 잠기고 자켓이 자동으로 몸에 피팅되고, 스케이트보드와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이천십오년. 일단 과거로 돌아가는 1편을 보다가 잠들었다. 꿈을 꿨다. 드로리안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기라도 했던 걸까. 그 사람이 아직 살아있는 꿈을 꿨다. 종종 꾸는 꿈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평소같았으면, '사실은 죽지 않았다'라는 설정이던가, 상황 자체가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에게 죽지말라고 하는 장면들을 보는데 이번에는 완벽하게 과거로 돌아가있었다. 그도 나도 과거에 있었다. 나쁜 사람. 연인으로서는 정말 나빴던 사람. 꿈에서 깼는데 너무너무 화가 났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 화를 내서 뭐하겠는가. 늘 말하지만, 당신이 죽는 바람에 이제는 욕도 못 하게 됐잖은가. 그냥 화가 난다. 이제는 내 자신에게 화가난다.
잠에서 깨어 잠시 멍하니 있다가 날짜를 세어보았다. 현실이다. 메시지가 여러개 와 있다. 후키가 남자친구랑 헤어졌단다. 대학동기가 오사카에 놀러온단다. 선생님께서 비자 수속 빨리 해서 영수증 받아오란다. 칼럼집필은 잘 되고 있냔다. 그 하나하나에 답장을 했다. 우르르르르르 쏟아져내린 내 현실.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졌다. 그렇게 하루가 가버렸다. 오늘 해야 했던, 하려고 했던 일은 하나도 하지 못한 채 과거의 악령같은 기억에서 허우적댔다. 그럴 필요 없었는데, 슬픈 하루가 되었다.
2015년 10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