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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왜 스스로를 분리했는가?

근대디자인사 #6. 분리파(Sezession)

by 공일공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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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리는 전시의 룰을 다시 쓰는 일이었다.

1897년 봄, 빈의 전시장을 떠난 젊은 작가들이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요제프 호프만, 콜로만 모저, 알프레드 롤러, 요제프 올브리히가 그들이다. 이들은 낡은 심사와 취향이 지배하는 전시 제도를 떠나 새로운 협회를 만들었다. 이름은 ‘분리파(Sezession)’였다.

표어는 간단했다.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그 자유를. 그들의 목표는 양식을 갈아치우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전시를 기획하는 방식,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 그래픽과 건축, 운영과 재정까지 예술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 전체를 갈아엎는 일이었다. 그래서 분리는 과거를 버리는 제스처가 아니라, 플랫폼을 새로 짓는 설계 행위였다.




문제는 '더 잘 그리기'가 아니라 '더 잘 보여주기'였다


링슈트라세 이후 팽창한 부르주아 문화는 역사주의 취향을 안전한 표준으로 삼았다. 공공 발주와 학회는 과거 양식을 반복하는 작품을 우대했다. 새로운 시도는 심사에서 걸려 내려오는 일이 잦았다.


분리파는 진단을 바꿨다. 문제는 작가의 실력이 아니라, 실력이 통과할 ‘문’이었다. 그래서 협회를 따로 만들고, 자체 잡지 Ver Sacrum을 창간하고, 국제 작가를 직접 초청하고, 심사 기준과 운영 규칙을 공개했다. “잘 그리는가”를 묻기 전에, “잘 보이게 만드는가”를 먼저 설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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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축과 제도 디자인 - 올브리히 전시관은 ‘간판’이자 ‘시스템’이었다


요제프 올브리히가 설계한 분리파 전시관은 흰 벽과 평면적 장식, 금빛 월계수 돔으로 기억된다. 자연 모티프는 남겨두되, 과잉을 덜어내고 면과 비례를 엄정하게 정리했다. 건물은 작품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단체의 태도, 질서, 말투를 시각화한 협회의 아이덴티티를 발신하는 총체적 장치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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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의 표어는 브랜드 보이스이고, 대칭과 리듬이 살아 있는 입면은 운영 원칙을 시각화한 레이아웃이다. 출입·대기·전이 공간은 관람 동선을 통제하는 UX이며, 외벽 장식의 패턴은 인쇄물과 간판으로 연동되는 그래픽 모듈이다. 작품만 새롭지 않았다. 작품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건축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이 전시관은 곧 제도 디자인이었다.




2. 그래픽과 타이포 - 평면(Fläche), 실루엣, 그리드의 언어


알프레드 롤러와 콜로만 모저는 포스터와 지면에서 강한 평면 처리와 실루엣, 명료한 정렬을 밀어붙인다. 색은 제한하고, 여백은 크게 두고, 활자는 굵고 간결하게 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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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 Sacrum은 지면 그리드, 도판 배치, 여백 비율을 실험하는 실험실이었다. 타이포·도판·여백의 관계가 매호 다듬어지고, 전시 포스터·표지·초대장·표지판·가격표·전시장 안내가 동일한 규칙으로 연결된다. 시각 요소의 개별 미감보다, 관람 경험 전체의 일관성이 더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한다. 여기서 오늘의 아이덴티티 시스템 원형이 보인다.




3. 1902 베토벤전 - 전시는 ‘총체경험(Gesamtkunstwerk)’이 된다


호프만은 동선과 조도를 설계하고, 클림트는 베토벤 프리즈로 서사를 구축한다.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이 중심을 세우고, 음악과 그래픽이 감정의 상승 곡선을 조율한다. 관람은 감상이 아니라 연출된 흐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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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는 한 장의 그림이 아니라 공간·소리·움직임이 동원된 편집으로 전달된다. 시세션이 꿈꾼 것은 장르의 합이 아니라 경험 설계였다. ‘무엇을 보여줄까’보다 ‘어떻게 느끼게 할까’가 전시의 핵심 과제가 된다.




빈 공방에서 바우하우스로


1903년 호프만과 모저는 빈 공방(Wiener Werkstätte)을 설립한다. 가구·직물·식기·주얼리·포장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반을 동일한 원칙으로 설계한다. 기하·패턴·모듈은 곧 독일공작연맹과 바우하우스로 이어지고, ‘과잉을 덜어낸 구조’는 산업과 교육의 표준으로 정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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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의 결과는 고립이 아니었다. 오히려 교육·산업·시장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시스템이 탄생했다. 그들은 감각을 억누르지 않았다. 감각을 견고한 체계 안에 담아 보편적 언어로 번역했다. 오늘날의 브랜드 경험, 전시 브랜딩, 디자인 시스템을 거슬러 올라가면 시세션의 실험이 중심에 있다.




분리는 해체가 아니라, 맥락의 재설계였다


시세션은 과거를 부정하려 한 것이 아니다. 동시대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방식’을 다시 설계하려 했다. 건축은 선언을, 그래픽은 질서를, 전시는 경험을, 매체는 네트워크를 맡았다. 스타일의 이름이 아니라 운영 체계의 혁신으로 읽어야 한다.


오늘의 디자이너에게 남는 질문은 단순하다. 양식보다 먼저, 보여주는 방식을 재설계하고 있는가? 이 한 줄이 여전히 유효하다.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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