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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가 터졌습니다. 하필 그곳이

바느질로 수습한 하루

by 해이



중요한 전화통화를 앞두고 있었다. 앞으로의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긴장된 상태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으며 사무실에서 기다리다 보니 1년 내내 핸드크림이 필요했던 내 손에서 연신 땀이 배어 나왔다. 이런 상태로 전화를 받으면 신경이 쓰일 것 같아서 잠시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향했다. 그저 긴장을 털어내기 위한 하나의 행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화장실 문을 닫고 거울 앞에 선 순간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했다. 허벅지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냉기가 느껴져 확인해 보니 너무도 정확하게 바짓가랑이가 터져있었다. 가장 민망한 위치. 긴장 때문에 이미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는데, 그 위로 당황스러움이 겹쳐져 맥박이 두세 배는 더 빨라진 것 같았다. 손바닥의 땀은 폭포수처럼 흐르기 시작했고, 머릿속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이걸 지금 어떻게 해야 하나, 통화 전에 집에 다녀올 수 있을까, 누가 이미 본 건 아닐까, 출근길 버스에서 누군가 알아채지는 않았을까.' 온갖 상상과 불안이 밀려왔다. 그 순간만큼은 바지의 구멍보다 내 마음의 구멍이 더 크게 느껴졌다.


사무실로 돌아와 사장님께 조심스레 상황을 말씀드렸다.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여간 민망한 것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바지가 좀 터져서요. 점심시간에 집에 좀 다녀와도 될까요? 1시간이면 될 것 같아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빨개진 귀와 양볼을 감싸며 말씀을 드리는 내게 사장님은 혜안을 주셨다.


"편의점에서 반짇고리 팔아요. 바느질할 줄 아시죠?"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계속되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가장 단순한 해결책조차 생각지 못한 나 자신이 우스웠다. 나는 곧장 편의점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일을 앞두면 종종 사소한 사고들이 따라붙곤 한다. 이게 흔히 말하는 액땜인가. 아니면 '재수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오늘의 코가 바지인 걸까. 이런 일이 생겼다는 건 통화가 어그러지려는 전조가 아닐까. 계단의 금속 난간이 손바닥에 차갑게 닿는 동안 그런 불길한 생각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그럴수록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바지 구멍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은 점점 더 적나라해져갔다.


편의점에서 반짇고리를 집어 들고 계산을 마친 뒤, 화장실에 다시 들어갔다.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자 맨다리 위로 찬 공기가 내려앉았다. 바늘과 실을 꺼내 들자마자 심호흡을 했다. 긴장과 당황이 뒤섞인 상태에서 바느질을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주머니에서 바늘을 꺼내려는데 손가락이 찔렸고, 반사적으로 손을 털었다. 이런 순간엔 작은 통증도 크게 느껴진다. 구멍에 실을 넣으려는데 땀에 젖은 손가락이 미끄러져 헛손질을 반복했다. 바늘은 몇 번이고 바닥에 떨어졌고, 나는 다시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 와중에 희한하게도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겨울마다 할머니가 뜨개질로 떠주시던 조끼. 단조로운 패턴과 약간은 거친 촉감, 목에 닿을 때마다 느껴지던 따가움, 그리고 그 조끼에서만 느껴지던 안정감. 초등학생 때 양말에 구멍이 나면 바느질로 꿰매 신던 나. 그런 유년의 이미지가 바늘 끝에 겹쳐졌다.


손은 계속 떨리고 실마디가 엉키기도 했지만, 나는 바느질을 이어 나갔다. 지금 당장 바지를 갈아입을 수도 없었고, 옷을 새로 사기엔 다음 월급까지 버텨야 하는 현실이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꿰매입는 것 뿐이었다. 차분히 바지를 손에 쥐고 한 땀씩 꿰매다 보니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상황은 크게 변한 게 없었지만, 바느질을 이어가는 내 손이 조금씩 주도권을 되찾아오고 있었다. 마지막 매듭을 지으며 나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찬바람은 더 이상 틈을 비집고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까지의 불길함과 불안이 조금은 사라져 있었다.


마음이 진정되면서 통화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감은 맞았다. 통화는 무사히 끝났고,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겠다는 계획이 섰다.


돌이켜보면 오늘의 상황은 사소하지만 큰 결론을 남겼다. 터져버린 바지에 나는 잠시 좌절했어도, 결국 스스로 꿰매 입고 나를 진정시켰다. 찢어진 천을 이어가던 그 동작들이 마음의 구멍까지 함께 꿰매준 것 같았다.


거지 같은 삶은 종종 예고 없이 사건이 터지고, 나는 그 틈에서 온몸이 흔들리지만 결국 다시 기워내며 살아간다. 오늘 나는 바지를 꿰맸고, 그 바늘 끝에서 내 하루와 내 마음을 이어냈다. 중요한 순간 앞에서 비록 불안할지언정 나는 곧 다시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앞으로 어떤 구멍이 생기더라도 나는 다시 꿰매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하다.



KakaoTalk_20251119_170128253_01.jpg 너라는 바지, 똥멍청이 (꿰매다 말고 글감을 획득했다는 사실에 좋아하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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