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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않은 마지막 성냥불

그러나 어른들은 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by 해이



추웠다. 아주 어린 소녀가 작은 손으로 성냥을 긋고 있었다.
한 번 켤 때마다 짧게 타오르는 불꽃은 소녀의 얼굴을 잠깐 환하게 비추었다가, 이내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나가던 어른들은 그 빛을 보면서도 모른척했다. 성냥불은 분명히 켜지고 있었는데, 누구도 그 불꽃을 도움의 요청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게 불꽃은 하나둘 꺼졌다.


동화 속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이 모두 사라짐과 함께 마지막 불꽃 아래에서 할머니를 보며 천천히 숨을 거뒀다. 하지만 그 장면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냉정하리만치 지나쳤고, "다른 사람이 대신 도와주겠지"라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작은 불꽃은 그렇게 어른들의 무심함 속에서 꺼져버렸다.



2025년 포천의 한 빌라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6개월 된 아이가 석 달 동안 효자손과 손에 맞아 뇌경막이 골절되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아이의 몸은 매일 성냥불 하나씩 꺼지는 것처럼 점점 힘을 잃어 갔지만, 아무도 그것을 구조 신호로 읽지 못했다. 부모는 서로에게 죄를 미뤘고, 나중에는 고작 1.5kg짜리 말티즈에게까지 책임을 떠넘겼다고 한다. 동화였다면 아마 "고양이가 그랬어요"라고 말하는 미숙한 왕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 소름 돋는 지점은 따로 있다.

그 아이의 몸에서 멍을 발견한 어린이집이었다. 아이는 3개월 동안 그곳에 다녔다. 아이의 몸에 누적된 상처는 우연이라 보기엔 반복적이었고, 지나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이집은 물증이 없다는 말과, 넘어졌다 대답하는 엄마의 말만을 뱉었다. 마치 눈앞에서 잠시 켜진 성냥불을 보고도 그 빛이 구조 신호인지도 모르고 손바닥으로 슥 문질러 꺼버린 것처럼, 그들은 불빛을 지웠다.


친부는 이혼 후 단 한 번만 아이를 만났다고 한다. 이웃은 울음소리를 들었어도 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기 어려웠다. 아이는 그 작은 방에서 성냥불을 계속 켜고 있었지만, 그 불빛을 올려다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 어린 탓에 말로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고, 스스로 밖으로 달아날 힘도 없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몸의 상처로 자신을 알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불꽃이 꺼진 뒤에야 병원은 말했다.


"학대 의심."
"영양결핍 의심."
"이미 늦었습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마지막 불꽃 아래에서 잠시나마 따뜻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아이는 그 순간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생을 마쳤다. 동화 속 어른들은 무심했고, 현실의 어른들은 그 무심함을 더 견고하게 재현했다. 바쁘다는 핑계, 괜히 끼어들기 싫다는 두려움, 정확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자기방어. 결국 그 모든 요소가 한 아이의 생명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동화 속 성냥팔이 소녀를 슬퍼한다. 하지만 정작 오늘의 현실 속 아이가 보내는 요청에는 여전히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도움을 요청할 수조차 없다. 말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올 방법도 없고, SOS 신호는 푸른 멍과 울음으로만 남는다. 그 요청의 불빛이 켜지는 순간 어른들이 먼저 알아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증거와 정황을 의심하는 말이 아니라, 첫 번째 성냥불이 켜진 순간 바로 손을 내미는 일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비극은 동화이기에 우리가 끝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지만, 현실의 아이들은 끝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아이의 생명은 '마지막 불꽃'을 견딜 만큼 길지 않다. 그 불꽃이 꺼지고 나서야 의심을 하고, 신고를 독려하는 것은 너무 늦은 후회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는 그 말을 듣지 못한다.
우리가 외면한 첫 불꽃이 이미 꺼졌기 때문이다.



※ 본 글은 2025년 12월 3일자 "뉴스1" 보도 내용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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