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을 적은 시행문, 진실을 기록한 우리
일요일 오전, 창 아래로 얇은 햇살이 번졌다. 창문을 조금 열어 둔 탓에 상쾌한 아침 공기가 스며들었고, 집 안에는 주전자에서 오르는 김과 은은한 차 향만 남았다. 식탁 위에는 얇은 줄 노트, 검은 볼펜, 형광펜 두 자루, 그리고 전날의 메시지가 켜진 휴대폰이 가지런히 놓였다.
현관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났고, 문이 조용히 열렸다. 제아가 들어와 신발을 가지런히 놓은 뒤, 짧은 고갯짓으로 안부를 대신했다.
어머니가 “왔구나” 하고 자리를 한 칸 비켜주었다. 제아는 의자에 앉아 노트북 전원을 켜고 날짜를 적었다.
2025년 ○월 ○일, 토요일 오전.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고충민원 통보 ― 확인 및 계획.
어머니가 머그컵을 제아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아버지는 휴대폰을 식탁 한가운데로 밀었다. 화면 밝기가 잠시 낮아졌다가 다시 켜지며 익숙한 제목이 떠올랐다. ‘고충민원 통보’. 어젯밤엔 한 줄이면 충분했지만, 오늘은 문장으로 확인해야 했다.
어머니가 형광펜 뚜껑을 열며 조용히 말했다.
“핵심부터 보자. 감정은 빼고, 사실만.”
1. 고충 민원 결과 통보 ―
시행문은 차갑게 적시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제출한 수많은 증거와 법조문, 대법원 판례까지 덧붙인 고충 민원에 대한 구청의 답변이었다.
“민원인이 제시한 고충 민원 주장은 타당하지 않으며, 관련 판례에 따르면 본 사안은 해당 법률 위반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그 문장을 짚으며 말끝을 단단히 눌렀다.
“봐라, 제아야. 내가 분명히 수취 거부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제시했잖니? 효력은 수취 거부 시 발생한다고. 그런데 감사과 공무원들은 전혀 엉뚱한 판례를 끌어다가 써놨다. 그것도 관리인을 감싸기 위해서지.”
아버지는 말을 잠시 끊고 서류철 모서리를 한 번 반듯하게 맞췄다.
숨을 고른 뒤, 낮게 이어갔다.
“세상은 1분 1초로 바뀌어 가는데, 여전히 자기들 세계가 전부인 양 시민을 가르치려 든다.
대통령도 법을 무시하고 왕처럼 권력을 휘두르다 두 번이나 탄핵을 당한 시대다.
선출직 구청장, 지방직 4급에서 6급까지—법 앞에 예외는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하던 대로’였다고? 그들은 우리에게 조롱하듯 말하지만, 오늘부터는 아니다. 기록으로 바로잡자.
우리가 남긴 이 한 줄 위에 다음 사람이 더 완전한 기록을 쌓을 거고,
그렇게 해서 저 관념은 다시는 발붙이지 못할 거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제아가 숨을 고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오늘부터 다르게 가요.”
어머니가 펜을 들어 여백에 짧게 밑줄을 그었다.
“그럼, 경종은 기록으로 울립시다.”
제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 이건 판례를 악용한 거예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붙여서… 마치 관리인이 아무 문제없는 사람인 것처럼 위장해 버렸잖아요. 시민을 지켜야 할 구청이, 도리어 범죄자의 방패막이가 되다니. 이런 현실은 정말 처음 봐요. 그리고, 증거가 이렇게 많아도 결국은 이런 가짜 문서를 내밀며 버티는 거군요. 시민을 속이려는 시행문, 그게 전부네요.”
이 지역 오피스텔이 같은 브랜드의 연쇄 구조로 묶여 돌아가는 현실, 그 뒤에 얽힌 굵직한 이해관계를 떠올리면—이 시행문을 유착 없이 설명하긴 어렵다.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그러니까요. 이건 누가 봐도 법꾸라지예요. 법의 틈새를 파고들어서 범죄자를 보호하는 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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