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삼일이 지나고 학교로 왔다. 삼일 동안 역시 연락은 되지 않았다. 그날의 여름밤이 무색하듯 주는 답장 한 번 주지 않았다. 학교에서 주를 보던 날 온은 너무 반가웠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지는 것 같은 기분에 그저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온과 주는 다시 SF 소설 마치기에 돌입했다. 주의 잠수로 미뤄진 일정을 맞추기 위해 온은 더 열심히 써 내려갔다. 마지막 한 문장을 쓰고 온과 주는 처음부터 다시 읽어봤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완성했다는 사실이 둘을 기쁘게 만들었다. 아직 마감일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므로 온과 주는 퇴고까지 도전해 보기로 했다. 주말이 되면 온의 집으로 가 글을 매끄럽게 만졌다. 어느 날, 온은 엄마와 크게 싸우고 말았다.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사춘기 고등학생이 글에 매달리고 있는 모습을 온의 엄마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온은 맞서지 않았다. 그저 방문을 쾅 닫고 엄마의 말을 무시했다. 토요일의 싸움이 일요일까지 이어졌을 때, 온은 주에게 고백했다. '오늘은 우리 집 못 와.' 마감일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주는 고민하는 듯 답장이 느려지더니 한 문장을 보냈다.
주의 집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집에 갈 수 없는 이유를 알면서도 주의 사는 곳이 궁금해 갈 수밖에 없었다. 주를 찾아갔던 날 주의 아버지의 무심한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해 갔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주에게 안전한 사람일까.
일요일 주의 집에는 할머니만 계셨다. 주의 아버지는 출장을 갔다고 했다. 출장을 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온만 하는 게 아니길 바랐다. 주의 할머니는 다정해 보였다. 적어도 온에게만큼은. 주에게는 차갑디 차갑게 대하면서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는 아주 따뜻한 마음을 보여줬다. 주는 온을 방으로 데려갔다. "아버지가 안 계셔서 다행이야." 주에게 묻고 싶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는 게 왜 다행인지. 알 수 있었지만 확실하게 듣고 싶었다.
온과 주는 SF 소설의 첫 퇴고를 마쳤다. 아직 미숙한 글이지만 완성하고, 다듬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공모전에 둘의 작품을 제출했다. 제출까지 마치고 나니 해냈다는 기분이 들어 온과 주는 뿌듯했다. 주는 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덕분에 무언가를 해냈네, 내가." 온은 생각했다. '덕분에 함께 해냈네, 우리가.' 주와 온은 잠시 수다를 떨었다. 내일은 개교기념일이라 학교가 쉬는 날이었다. 글을 쓰며 서로의 것을 조금은 풀어냈지만 온과 주 사이의 대화는 아직 부족했다. 온은 주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주는 온에게 말해주고 싶은 게 많았다. 주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방 밖으로 잠시 나갔다 왔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잘래?" 뜻밖의 말에 온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엄마와 냉전 중이었고, 내일은 개교기념일이고, 주를 더 알고 싶었다.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자 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의 아빠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지만 소설 공모전을 제출해서 축하하기 위한 잠자리라고 설득했다. 온의 아빠는 엄마와 달리 소설 공모전을 도전한 온이 자랑스러웠나 보다. 거하게 축하하라며 함께 야식을 먹을 용돈까지 보내주며 허락했다. 주의 할머니가 차려주신 저녁을 간단히 먹고 함께 편의점으로 나갔다.
"나는 아버지가 싫어." 편의점으로 가는 길에 주가 말했다. "나도 네 아버지 싫어." 하면 안 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도 나를 싫어해. 할머니도 나를 싫어해. 모두가 나를 싫어해서 집에 있는 게 숨 막혀." 주는 큰 숨을 쉬며 말했다. 주의 상황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듣게 되니 조금은 두려웠다.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추측을 확신받을까 봐 무서웠다. "내가 딸로 태어나서 할머니는 어머니한테 못되게 굴었어. 그래서 우리 가족은 붕괴됐어. 어머니에게 향하는 분노는 나를 미워하는 걸로 대신하게 됐어. 아버지는 할머니가 하는 말과 행동을 막지 않으셔. 오히려 할머니에게 대들 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때려. 무참히 때려. 얼굴은 겨우 피하는데, 저번 방학 때는 피하지 못했어. 그래서 만나지 못했어. 미안해." 주가 미안할 게 아니었다. 편의점에서 집까지 가는 짧은 길 동안 주는 간단히 풀어냈다. 자신의 아픈 상황을. 온은 주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주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위로하기 힘든 일이었다.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고민하고 고민했다. 주를 이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온과 주는 방으로 들어가 사 온 과자를 먹으며 마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듣지 못하게 소곤소곤 조심스럽게 했다. 주가 받았던 혐오, 멸시, 폭력 등의 이야기를 들으니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주를 찾아가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감정이라곤 하나 없는 로봇 같았다. 고칠 수도 없이 그대로 굳어버린 로봇. 주의 고백을 들으며 온은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우리 도망치자. 신고하자. 떠나버리자. "네 덕분에 요즘 행복해." 온은 하고 싶은 말 대신 진심을 전했다. 주는 가만히 웃었다. 사랑스럽게 웃는 주를 쓰다듬었다. 주 덕분에 온의 일상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찼다. 주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주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과 동일했다. 주에게 다정한 말을 하며 온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