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
푸쉬이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전거 공기압 마개가 완전히 잠겼다. 나머지 바퀴에도 공기압을 채운 후 준혁은 자전거 바퀴를 꾹꾹 눌러보았다.
“이 정도면 되겠다.”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라 준혁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어릴 때부터 혼자 자전거를 타고 멀리 다녀오는 걸 좋아했었다. 대학생이 되고 학업에 아르바이트에 자전거 탈 시간이 없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집에 온 김에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쐬러 나갔다 오기로 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자전거를 타고 보는 풍경이 어우러져 준혁은 마치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동네에서 이 시간에 자전거를 타는 게 처음이라 자전거 도로를 달리며 보는 하천과 산책로가 이렇게 예뻤는지도 처음 알았다.
‘이런 게 행복이지.’
준혁은 괜히 신이 났다. 어디까지 갔다가 올지 생각하며 시계를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두 시간 잡고, 한 시간쯤 간 거리에서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준혁의 동네는 지대가 높은 편이었다. 자전거 도로에 들어서자 완만한 내리막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페달을 구르지 않고도 자전거 바퀴가 기분 좋은 속도로 계속 굴러갔다. 걷는 연인들, 가족들, 그리고 뛰면서 운동하는 사람들 모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스름하게 노을이 지는 풍경과 건물들도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미리 맞춰놓은 워치에서 알람이 울렸다. 생각보다 힘들이지 않고 꽤 멀리까지 온 것 같았다. 더 멀리 타고 가보고 싶었지만 돌아갈 생각도 해야 했다. 잠시 아쉬운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본 후 자전거를 돌렸다. 가져온 음료수를 따 한 모금 마시고 숨을 한번 고른 뒤, 준혁은 다시 온 길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굴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아까보다는 좀 더 힘든데?’
아까 온 길이 완만한 내리막이었으니 이제부터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타고 가야 한다. 그래서인지 준혁은 페달을 구르는 다리에 좀 더 힘이 들어가게 되는 것을 느꼈다. 아까 비축해 둔 힘으로 조금 더 힘을 내고는 있지만 언제부턴가 확실히 더 힘이 드는 게 느껴졌다. 아직 50분은 더 가야 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힘이 들어서 어떡하나 싶었다. 자전거를 평소에도 좀 탈걸, 하는 후회도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체력이 떨어졌나 싶은 생각도 드는 찰나, 숨이 턱에 까지 찬 준혁은 고개를 떨구고 숨을 고르다가 뒷바퀴를 보게 되었다. 뒷타이어가 언제부터인가 펑크가 나서 바퀴가 바닥에 붙은 채였다. 어쩐지, 너무 힘이 들더라니. 어디서 날카로운 걸 밟고 펑크가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너무 오래 자전거를 타지 않고 방치해 둬서 고무 튜브가 삭았을지도 모른다. 정작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펑크 난 타이어를 끌고 걸어서 집까지 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게다가 집까지는 앞으로 계속 오르막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도 힘들 텐데 걸어서 가기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준혁은 펑크 난 자전거를 계속 타고 가기로 맘먹었다. 눌어붙은 타이어가 안 그래도 힘든 준혁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를 악 물고 더 힘껏 페달을 굴렸다. 집까지 가기 위해선 하천을 건너는 나무다리를 한번 건너야 했다. 하필 그 다리는 아치형으로 생겨 그냥도 건너기 힘이 꽤 드는 다리였다. 저만치 앞에 다리가 보였다.
“속도를 줄이면 안 돼! 준혁아 가자!”
준혁은 스스로를 격려하며 페달을 밟는 힘을 더 주기 시작했다. 속도가 줄어들지 않게 해야 했다. 눈을 질끈 감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 페달을 구르며 아치형의 다리에 진입을 했다. 다행히 정점에 올라왔다 생각한 순간 눈을 뜬 준혁 앞에 지팡이를 짚으며 조심해 걷고 있는 한 할머니가 보였다.
“어, 어어어!”
준혁이 이미 너무 속도를 낸 탓에 핸들 제어가 되지 않았다. 브레이크를 꽉 움켜 잡은 순간 자전거는 심하게 흔들리며 이미 할머니를 피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대로는 할머니가 크게 다칠 상황이었다. 준혁은 눈을 질끈 감고 오른쪽으로 몸을 강하게 눕혔다. 할머니를 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천 물로 떨어질 심산이었다. 다행히 할머니를 치기 전 자전거가 공중에 떴다. 그리고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며 준혁과 함께 하천 물로 떨어지고 있었다. 준혁은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만 희생하자. 나는 물에 안 빠지고 싶단 말이야!’
그 순간 준혁이 생각한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 준혁은 함께 떨어지던 자전거에 힘을 실어 떨어뜨려 보내고 자신은 그 힘을 역이용해 한번 더 도약을 한 것이다. 준혁은 말도 안 되는 점프력으로 뛰어올랐다.
풍덩… 착.
자전거가 물에 빠지며 나는 소리가 나고 준혁은 무사히 땅에 착지했다… 가 옆으로 넘어져 굴렀다. 히어로처럼 멋지게 착지하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준혁은 무릎과 팔꿈치를 연신 비비며 일어섰다. 그리 깊지 않은 물에 완전히 처박혀 버린 자전거가 보였다. 그제야 준혁은 자신이 착지한 위치가 자전거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멀리 뛰었지? 준혁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좀 전의 상황이 너무 급박했어서 잘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자전거와 자신의 거리를 볼 때 엄청난 거리를 점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준혁의 보폭으로 열 걸음 남짓한 거리였다.
“우와. 장난 아닌데?”
준혁은 사람이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어떤 초능력이 나타나거나 갖고 있는 능력이 배가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만약 자신에게도 그런 게 생긴 거라면 뭔가 좀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주먹을 쥐었다가 펴서 손바닥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어딘가에 미치자 준혁은 낙심한 표정을 지었다.
“아, 자전거 어떡하지…”
하천에 빠진 자전거를 건져내서 집까지 끌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때였다. 바지에 있는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아빠였다.
“아빠, 지금 잠깐 일이 생겨서 늦었어요. 네, 아니에요. 집 근처예요. 금방 들어갈게요. 네, 아빠.”
시간을 보니 집에서 나올 때 생각했던 시간보다 이미 훨씬 지나있었다. 어떡하지. 자전거는 펑크가 난 데다가 저렇게 물에 빠져있고, 집까지 거리는 아직도 한참 남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자전거는 내일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준혁은 집까지 뛰기로 했다. 아빠가 걱정하실까 봐 집 근처라고 말한 게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준혁은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 별로 힘이 들지 않아서 준혁은 더 빨리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씩 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주변에 보이는 풍경이 점점 빨리 지나가는 걸 준혁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힘이 들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굉장히 빨리 뛰고 있었지만 마치 걸으면서 보는 듯 주변의 풍경과 사물이 준혁의 눈에 보였다. 밤이 깊은 데다가 조용한 길이라서 사람들이 없었다. 준혁이 달리는 속도는 이제 자전거보다도 훨씬 빨랐다. 누군가 키우는 닭 두 마리가 준혁의 달리는 것을 보고 놀란 모습이었다. 닭이 보이는 풍경을 지나 좀 더 달리다 보니 어느덧 준혁의 동네에 거의 다다랐다. 시계를 보니 아까 아빠와 통화한 지 5분이 지나있었다. 자전거로는 30분 정도 걸리던 거리였다. 조금 걸으며 숨을 고르자 준혁의 호흡은 다시 평소처럼 가라앉았다. 전화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아빠, 지금 문 앞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