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태경은 화장실에 다녀오는 중이었다. 탕비실에 절반쯤 열려있는 창문에서 솨아- 하는 소리가 났다. 대로변에 있는 건물이라 자동차들 지나가는 소리가 그런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습기를 머금은 더운 바람이 얼굴로 확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 창가에 다가서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사무실에서 여태 에어컨을 쐬다 온 태경에게 그 바람은 더운 해변가에서 부는 바람처럼 불쾌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창문을 닫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 태경은 손을 뻗어 창문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그렇게 외부소음이 차단된 순간, 태경의 귀에 누군가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응? 구석에 있는 건 태경의 회사 후배였다. 입사한 지 몇 달 안 된 막내가 주저앉아서 울고 있는 것이었다. 태경은 짧은 순간에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회사 동료 여직원인 A에게 배달된 소포가 누군가에 의해 뜯겨있었던 게 일의 시작이었다. 일반적인 택배상자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소포였는데, 그 일로 인해 A는 후배에게 불같이 화를 냈었다. 그럴 만한 것이 배달된 택배를 정리하고 관리하는 건 그 후배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A는 앞뒤 확인도 하지 않고 후배에게 화를 내고, 후배는 이상하게도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포로 온 것이 무엇인지, 후배가 그 소포를 왜 뜯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A가 반차를 내고 회사를 나가버리고, 후배는 회사에 남아 울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두 사람은 평소에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 태경은 후배에게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지금 아는 척을 하는 게 맞는지 고민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뒤돌아서서 사무실로 향하는 그에게 후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알아요. 제가 잘못한 거라는 거요.”
태경은 답할 말을 생각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응. 그래. 너도 실수할 수 있지.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야.”
실수라는 말에 후배는 태경을 빤히 쳐다봤다. 자신은 ‘잘못’이라고 했는데, 태경이 ‘실수’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반응하는 것 같았다. 태경은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낮은 테이블 하나에 걸터앉았다. 후배는 그때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소포, 제가 뜯은 건 아니에요.”
놀라운 말이었다. 그렇다면 후배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누군가를 대신해서 욕을 들었다는 말인가. 그 뒤로 후배는 자세한 내막을 태경에게 들려줬다. 소포를 뜯은 건 또 다른 후배직원 B였다. 세 사람은 자주 밥도 먹고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A가 겪고 있는 우울증을 알고 있는 B가 걱정되는 마음에 그 소포를 뜯어보고는, 우려대로 위험한 약물이 배달된 것을 막내후배에게 알린 것이었다. 그리고 후배는 그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할 수 없어서 A에게 말했던 것. 그리고 지금의 이 상황이 된 것이었다.
“후회하는 거지? 그걸 A에게 말한 걸 말이야.”
태경은 조심스레 후배에게 말했다.
“네. 언니는 우리가 자기를 위험한 인물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 상처받은 것 같아요.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절대 그러지 않을 것 같아요. 정말 후회가 돼요. 언니가 더 이상 저를 예전같이 대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마음 아파요.”
후배는 다시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태경도 후배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아 마음이 쓰라렸다.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인지 태경이 후배의 팔을 잡고 말했다.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고 싶니?”
“네?”
후배는 태경의 질문이 갑작스러운 듯 되물었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모른 척하고, 그냥 언니 가까이에서 조용히, 언니를 관심 갖고 지켜볼 것 같아요. 혹시라도 위험한 생각 같은 거 하지 않게 그냥 같이 있어주고 싶어요.”
태경은 눈을 감고, 후배에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만들어보자.”
후배는 이상한 듯 태경을 쳐다봤다. 하지만 진지한 모습의 태경에게 동화된 듯, 눈을 감고 태경의 말을 따라 했다.
“아침의 그 일은 없던 일이야.”
“아침의 그 일은 없던 일이야.”
"그 소포는 아무도 뜯지 않았어."
"그 소포는 아무도 뜯지 않았어."
"언니가 상처받을 일은 생기지 않았어."
"언니가 상처받을 일은 생기지 않았어."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후배는 그 말을 마치고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정말 그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태경도 진심으로 후배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해요? 아침부터 명상의 시간?"
태경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차를 냈던 A였다. 아침에 봤던 그 생기발랄한 표정과 목소리로 태경과 후배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어머, 언니! 언제 왔어요?"
"일찍 출근했네? 뭐 하고 있었어?"
둘은 태경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 팔짱을 끼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언니, 나 건망증이 심해진 것 같아요. 나 저기 뭐 하려고 들어갔는지 생각이 안 난다니까요. 나이 먹었나 봐."
"어머, 나도 그래, 얘. 우리 나이 먹었나 봐. 그치?"
태경은 뭔가 이상한 기분에 시계를 봤다. 믿을 수 없었다. 시간은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날짜는 오늘 날짜였다. 믿기 어려웠지만, 태경은 이게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태경의 말대로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