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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by 삼오십

O 오늘은 뭐 했어?

B 오늘은, 키키의 산책이라는 그림책을 봤어.

O 그림책?

B 응. 그림책. 프랑스 사람이 작가인 것 같던데 뭐 이름이.. 좀 불어 같았어.

O 재밌어? 내용이 뭔데?

B 쥘리엥이라는 사람이 키키라는 개를 산책시키는 내용이야.

O 단순하네. 그게 다야?

B 응. 결국 그거야. 시작도 그거고, 끝도 그거고.

O 그렇구나. 인생이 뭐 그렇지. 단순한 게 진리잖아.

B 그렇게 말하니까 또 심오해 보이긴 하네.

O 그렇게 말하니까 또 뭔가 더 있을 것 같네. 더 얘기해 봐.


B는 잠시 생각을 하는 표정.


B 처음엔 개를 데리고 나갔는데.

O 개 이름이 키키라고?

B 응. 키키.

O 그런데?

B 가다가 독수리가 개를 낚아채.

O 헐. 그래서?

B 그 개 주인이 이름이 뭐였더라.

O 쥘리엥.

B 오 맞아. 기억력 좋네.

O 친숙한 이름이잖아.

B 그런가. 암튼 쥘리엥이 독수리랑 산책을 해.

O 헐. 뭐지.

B 그다음은 호랑이.

O 호랑이?

B 응. 그다음은 박쥐. 그리고 문어, 고릴라, 뱀...

O 먹이사슬인가.. 맨 나중엔 사람 데리고 산책하는 뭐 그런 건가?

B 오, 그것도 재밌겠다. 근데 아니야.

O 아니면 아무것도 안 남고 줄만 남은 것 아니야? 노인과 바다처럼.

B 그것도 재밌겠는데, 그것도 아니야.

O 뭐야. 오기가 좀 생기는데, 말하지 마. 맞춰볼래.

B 그래.


O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하는 표정.


O 모르겠어.

B 벌써?

O 응. 모르겠어.

B 생각해본 건 맞아?

O 아, 몰라. 궁금해. 마지막은 뭐야.

B 마지막은.. 다시 개야.

O 아까 그 키키?

B 아, 그건 모르겠다. 그 개인지, 다른 비슷하게 생긴 개인지. 오, 다른 개 일수도 있겠구나. 너 좀 참신하다?

O 아니, 그걸 모르면 어떡해?

B 근데 아마도 원래 키우던 키키일 거야.

O 어떻게 알아?

B 마지막에 그 개 주인이 대사를 하거든.

O 뭐라고?

B “이제 됐니?” 하면서 산책 그만하고 집 가자 그래.

O 그럼 키우던 개가 맞겠네. 키우던 키키.

B 응. 그런 것 같아. 키우던 키키. 아닐 수도 있고.

O 아니면, 다른 개라고?

B 음, 그럴 수도 있지. 뒤에 줄로 끌고 가던 독수리도 호랑이도 몰랐는데 자기 개인줄 뭐 알겠어? 어쩌면 눈이 어두울 수도 있고.

O 설마 그렇다고 자기 개를 몰라볼까.

B 이건 그림책이니까 너무 깊이 파진 말자.

O 그러자.


잠시 생각하는 둘.


B 근데 이 그림책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읽었는데 뒤에 생각할수록 뭔가 더 있는 것처럼 느껴져.

O 나도 그런 것 같아. 듣기만 했는데도 그러네. 뭔가 메타포가 있는 것 같고.

B 난 첨에 읽고는 그런 생각했어. 쥘리엥을 까는 거구나.

O 개 주인을 깐다고?

B 그렇잖아. 주인이 줄을 잡고 산책을 한다고 하면서 앞만 보고 가.

O 아, 뒤에 개 생각을 안 하고?

B 그러다가 숲도 가고 물도 가고 하는데 뒤에 있는 개를 신경을 안 써.

O 아 그러네. 뒤에 줄에 다른 동물이 따라가는데도 모르고.

B 응. 쥘리엥이 좀 자기중심적인 것 아닐까.

O 그런 것 같기도 하네.

B 어쩌면 인간관계 같기도 하고, 한쪽이 자기 위주, 자기 방식대로 나가니까 뒤에 따라가는 동물은 어쩌면 그거에 맞춰주는 다른 한쪽을 뜻하는 거지.

O 음, 일리가 있네. 난 약간 다르게 생각했어.

B 어떤?

O 마지막에 그 키키가 조강지처인 거야.

B 엥? 조강지처?

O 남자가 살면서 온갖 바람을 피우다가 늘그막엔 조강지처 손을 잡은 거지.

B 푸하하. 그건 너무 간 것 아니냐. 남자가 그랬다니까 이제 산책 됐냐고, 더는 싫으냐고 집에 가자고. 남자는 나름 노력한 거지.

O 음, 그렇다면 그건 여자 맘을 몰라주는 남자를 말하는 거야. 자기 식으로 최선만 다 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 여자 맘을 읽어야지.

O 뭐 그런 해석도 가능은 하겠다. 되게 웃긴다. 그림책 하나 보고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우리도.

O 뭐 어때. 해석은 읽는 사람 마음이지. 작가도 그걸 원할걸?

B 원하는지 까지는 모르겠고, 재미있다고 생각하겠다.


사이


O 내가 너무 내 중심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B 갑자기? 그게 또 무슨 소리야.

O 갑자기 그림책 얘길 꺼내는 것 보니까 그런 건가 싶어서.

B 네가 물어봤잖아. 오늘 뭐 했냐고.

O 그럼 그림책은 왜 읽었어?

B 네가 좋아할 줄 알았지. 이런 얘기 들려주면.

O 넌 진짜 내 마음을 모른다.

B 넌 진짜 자기중심적인 거 맞다.


서로 눈싸움한다.


(동시에) 됐고, 산책이나 하자.


서로 나란히 선 뒤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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