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한다. 해가 진 건지, 떠오르기 전인지 모를 어둠이 깔린 공항에, 나와 내 가족들이 있었다. 어두운 얼굴로 전광판을 확인하며 무언가 안내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 그 공간의 공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 어떤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안내방송이 안 들린다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고 핀잔을 주는 소란을 벌였다. '여기가 도서관이냐'라고 들리도록 중얼대는 내 말에 가족들은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장면은 바뀌었다. 나는 달리는 차 안에 있었다. 그녀는 뒷자리에 앉아 차창 밖 빌딩인지, 하늘인지 모를 무의미한 공간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듯한 눈빛이었고, 분노를 억누르듯 냉소적인 표정으로 창에 기댄 팔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한쪽 눈에서 볼을 타고 급하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는 모습을 보았다. 룸미러 너머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누군가의 휴대폰 화면 속에서 나는 내 이름을 보았다. 신원 확인된 사망자 명단 중 하나로. 비행기 착륙 사고였다. 바다에 추락한 비행기. 그 실종자와 희생자의 명단이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무도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던 이유를. 그리고, 그녀를 태우고 운전하고 있던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는 것도.
월영교에 도착하자,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여행 후기에서 '월영교는 밤이 되어야 더 좋다'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간을 잘 맞춰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후회로 바뀌었다. 다리 위엔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커플들과 가족들. 조용히 사색하며 걷고 싶었던 내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다.
‘관광지였지, 그래.’
나는 내 어리석음을 탓하며 마음을 다시 먹어보기로 했다.
‘관광을 한다고 생각하자.’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월영교를 바라보았다.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자 색색의 조명이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속으로 다시 생각했다.
‘이 긴 다리를, 인공의 빛 없이 어스름한 새벽 미명에 걸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 생각도 곧 접었다. 밤의 월영교는 참 예뻤다. 안타깝게도, 그 예쁜 걸 보고 있는 내 마음이 예쁘지 못했다. 이런 복잡한 얼굴로 이 예쁜 다리를 걷고 있는 내 모습을 누군가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분명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밤이라 얼굴 표정이 드러나지 않을 거라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색색의 조명들이 오히려 사람들의 표정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즐거운 얼굴들이 눈에 너무 또렷하게 들어왔다.
저 멀리, 탈 모양을 여럿 세워놓은 전광판이 보인다. 각양각색의 탈들. 어쩜 하나같이 그렇게 익살맞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 문득 생각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탈 하나씩을 쓰고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이 다리를 걷더라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지. 문득 나도 관광객처럼 월영교의 야경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깨에 걸려 있어야 할 카메라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없어졌다. 아니, 잃어버렸다.
찜닭집? 택시? 급하게 검색해 찜닭집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가다가 딸깍, 목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물었다. 없다고 했다. 아, 바보같이. 평소에 그렇게 비웃던 '관광지에서 소지품 잃어버리는 사람'이 나였다니. 휴대폰 화면에 일그러진 내 표정이 비친다.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 틈에서 나만 당황하고, 짜증 난 얼굴. 이럴 땐, 정말 탈이라도 하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택시에서 잃어버린 거라면, 찾기 힘들겠지. 더 짜증이 밀려왔다. 하필이면 택시비도 현금으로 냈다. 평소엔 잘 쓰지도 않는 현금을 왜 오늘따라 여기에 와서…
잘했다, 아주. 거금을 들여 샀던 카메라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이제 새 주인을 만나겠지. 사실 카메라보다, 그 안에 찍어둔 사진들이 아까웠다. 그러게, 귀찮다고 미뤄두지 말고 진작 옮겨놨으면 됐을 것을. 소용없는 생각이었다. 전광판 속의 익살스러운 탈들이 하나같이 내게 말을 거는 듯 보였다.
‘멍청한 놈. 그러게 잘 간수하지. 잘하는 짓이다. 쯧쯧쯧.’
월영교의 인공 달들이 보인다. 착잡하다. 우울하다. 기분이 가라앉았을 땐 아름다운 것들이 오히려 그 대비를 더 크게 만든다. 삼백만 원짜리 카메라를 잃어버려서도 아니고, 그 안에 담긴 추억과 작업물 때문만도 아니었다. 나는 우울했다. 결국,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