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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17. 2020

사람은 고쳐 쓰는 존재가 아니다.

깨달을 때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믿음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옆 팀 리더가 씩씩 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아마도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팀원을 혼내다 분에 못 이겨 회의실을 갓 뛰쳐나온 듯했다. 무자비하게 지나가는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의 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그 팀 리더에게 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내가 몇 번을 주의를 주고 가르쳐줬는데도 말을 참 안 듣네요. 역시 사람은 안 변하나 봐요."


해당 팀원에게 어떤 일을 진행할 땐 분명 중간중간 보고를 하고 진행하라고 했었는데, 아무런 말도 없다가 막판에 가서 확인을 하면 일이 하나도 안되어 있었다는 것.

물론, 자신도 팀 리더로서 수시로 챙겨야 했으나, 어떻게 자신이 그 모든 걸 챙기느냐고 한탄을 했다. 그러한 일이 한두 번 정도만 반복된 것도 아니고.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는 그 팀 리더가 충분히 이해되었다. 옆 부서 사람이라 그렇지, 내가 봐도 그 팀원은 답답한 부분이 있었다. 

일의 진행 상황은 빠를 수도, 느릴 수도 또는 진행이 안될 수도 있다. 가장 좋지 않은 건, 상사를 궁금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궁금하여 물어봤을 때 그 일이 진행마저 안되어 있다면 불길에 기름을 쏟아붓는 격이 된다. 그 팀원은 그렇게 불길에 기름을 자주 부었다. 


평소에 나도 어떤 충고를 해주고 싶었으나, 나의 구성원이 아니므로 함부로 개입할 순 없었던 것이다.


꼭 고쳐야 할까?


그래서 말인데, 직장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꼭 고쳐야 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안타깝게도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직장은 굴러가지 않는다. '사람을 고친다'라는 말이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이 옳고 그른 것임에 대한 판단을 잠시 보류해보자. 정말 잠시만이라도. 


월급을 받는 존재로서 우리 직장인은, 우리가 스스로를 직장에 맞추어야 한다. 

직장이 우리에게 맞춰주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이름보다는 대리, 부장이라는 직급에 자신의 자아를 욱여넣고 그에 맞추어 산다. 불편한 옷을 입고, 유쾌하지 않은 회의를 하며, 마시고 싶지 않은 술을 마신다. 팀이라는 공동 운명체, 그리고 개인이 아닌 팀의 '공동 목표'는 너와 나의 개인적인 욕구는 잠시 접고 스스로를 직장과 공동체의 '결'에 맞추게 하는 당위성이다. 


즉, 우리는 스스로를 고쳐 사회생활을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거나, 월급을 받지 않는(못하는?) 자유로운 영혼으로밖에 살 수 없다. 


우리는 결국, 우리 스스로를 '고쳐가며'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마구잡이로 고치려는 것이 문제!


직장은 '공동 목표'에 중독된 유기체다.

하루아침 눈을 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니, 잠이 들어서 꿈에서까지. 조직은 '공동 목표'를 떠올린다. 하지만 팀원 각각의 개인은 각자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고 생각이 다 다르다. 조직은 직진을 가리키지만, 팀원들은 저마다의 사정과 생각, 성격에 따라 움직이려 한다.


"직진할 거예요. 잠시 저기에 무엇이 있나 봤을 뿐입니다."
"아니, 조금 돌아가도 되지 않나요?"
"여기 지름길이 있는 것 같은데요?"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저는 그냥 여기에 있을게요."


저마다의 고집과 아집은 풍성하다.

그것이 개개인의 역량 중 하나라면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 용인하면 중구난방이 된다. 조직의 리더는 '직진'이 맞다고 생각되면 어떻게든 구성원들을 끌고 가야 한다. 그 길이 맞지 않으면, 책임은 리더가 지면 된다. 그러니, 직진을 할 수 있도록 구성원들을 어르고 달래고, 솔선수범하여 방향을 제시하고 어떻게든 데리고 가야 한다. 그런데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팀원이라면 '고치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


단, 상대방을 고친다는 것은, 그 존재 자체를 뒤바꿔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부작용도 크다. 자칫, 리더십에 심각한 오점을 남길 수도 있다. 당장 따라오지 않는 팀원을 마구잡이로 끌고 가는 것. 


급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절대 그래선 안된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언제?


분명, 사람은 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난폭했던 사람이 개과천선 하거나, 담배가 지독한 습관이었던 사람이라도 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았을 때' 그렇다. 

난폭한 자신의 행동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거나, 어린 자녀가 담배냄새 때문에 당신을 피한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마음이 아파 무언가를 깨달았다면 그 사람은 변할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를 고친 것이다. 

그러니, 남을 고칠 때도 그렇다.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한다. 

시간이 걸린다.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리더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 팀에는 사사건건 부정적인 답을 하는 팀원이 있다.

어떤 일을 지시하면, "그거 안될 텐데요.", "그건 어렵습니다."라는 반응이 먼저 튀어나온다. 솔직히 그 말을 들으면 화부터 난다. 하지만 감정을 잠시 접어 두고, 그 팀원은 대체 왜 그럴까를 깊이 고민해보니 그 패턴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에요. 저는 그런 일을 하고 있어요. 그걸 좀 알아주었음 합니다."


결국 인정받고 싶다는 메시지를 어린아이처럼 부르짖고 있던 것이다.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그 일을 해야 하는 당위성과 방향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주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어렵게 해낸 그 일이 어떤 성과를 내었을 땐 공개적으로 인정을 해주는 것이 좋다. 

그러면 확실히, 부정적인 대답을 하는 빈도수가 줄어든다. 


나는 상대방을 다 고칠 순 없다. 그래서도 안된다. 하지만, 리더는 그것을 시도해야 하며 가능한 그 팀원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어야 한다. 


꼭 리더가 아니라도 이런 일은 생활 전반 곳곳에서 일어 난다.




당장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따라오지 않는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뇌구조를 바꿔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위험하고 또 위험하다. 

자신의 방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과 나의 상사도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존 말코비치가 아닌 이상, 누구의 뇌나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도 안된다. 

모든 구성원이 고분고분하다면, 아마도 꼭두각시랑 일하는 느낌이 날 것이다. 다양성도 사라질 것이고, 생기 없는 로봇과 일하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더 편할 수 있다.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하지만 그럴 일은 없으니, 우리는 갈등이 생겼을 때 상대방이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정말 고쳐 쓸 수 없다.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고치고 변화해야 한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스스로)고쳐질 수 있다. 


어려운 일이지만 해야 하는 일이고, 중요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아마도 열에 몇 번 정도 성공할 일이 아닐까 싶다. 


다만, 깨달을 때 사람은 바뀔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나를 일으키고, 동시에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걸 마음에 간직하려 한다.


그러니까, 변화는 지금 여기 바로 '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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