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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n 15. 2016

'렘브란트'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시간이 갈수록 초라해진 그의 자화상 이야기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출간 정보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인터파크



눈이 감긴다.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건. 재채기. 태양의 눈부심. 그리고 죽음. 그는 이제 막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 화려한 날의 부질없음은 임종의 순간에 그 누구도 곁에 없다는 것으로 쉽게 설명된다. 그것도 초라한 유대인 지구 (Getto)에서. 1669년이었다.


[좌] 1669년 그가 죽은 해에 그린 자화상. 63세.
[우] 1662년 혹은 1668년에 그려진 것이라고도 알려진 왼쪽 얼굴 자화상


"경제적 파산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깊이 패여가는 주름의 명암"


1668년, 그의 하나 남은 아들 티투스가 사망한다. 첫 번째 아내와 세 자녀가 떠난 후 남은 단 하나의 피붙이였다. 얼굴의 주름보다 마음에 더 큰 주름이 생겼다. 그 주름은 '아픔'이라는 것이었을 수도, 삶의 의지를 약하게 하는 어느 하나의 '충격'이었을 수 있다. 그가 죽기 딱 1년 전이었으니.


1662년 결혼은 하지 못했지만 큰 위안과 예술적 영감을 준 두 번째 부인 헨드리케가 세상을 떠난다. 이미 그는 첫 번째 아내와 세 자녀를 보낸 경험이 있지만 이런 이별은 익숙하지가 않다. 이전에 겪은 경제적 어려움이 얼굴에 주름을 더욱 진하게 했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영혼을 쭈글 하게 했다.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얼굴의 주름이 깊어지게 마련. 1656년 과도한 미술품 구매와 미술투자 실패로 인한 파산. 이 즈음 이후 그의 얼굴에서 깊이 패인 주름은 그 명암을 더해간다.

[좌] [가운데] [우] 각각 1660, 1659, 1657년의 자화상


"예술적 영감을 준 뮤즈와의 만남"


1645년 예술적 영감을 더욱더 깊게 해 준 헨드리케와의 만남. 둘째 부인이었지만 정식 결은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내조는 그의 예술에 대한 원숙미를 더하게 했다. 가정부이자 모델로, 이후 그녀는 그의 뮤즈가 된 것이다.

1652년 자화상.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지만 뮤즈를 만난 후 그의 모습에서 당당함이 보인다.


"인생의 전환점을 만든 아이러니한 걸작"


1642년. '야경 (야간 순찰대)'로 알려진 그의 그림. 이 그림은 그 인생의 전환점을 만든다. 그 전환점은 두 개다.


하나는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해서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한 것. 화가로서의 명성을 곤두박질치게 만든 것. 그래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한 것.

또 하나는 그의 사후에 그를 '빛의 화가'라는 거대한 명성을 가져다준 것.


잘 나가던 '자본주의 화가', 그리고 '초상화의 전문가'를 단숨에 일감이 끊기게 한 아이러니한 걸작. 후대에는 이 그림 하나로 그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아이러니한 걸작. 인생이라는 아이러니. 후대에 큰 명성을 가져다준 그림이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이 그림을 의뢰한 사람들은 자신이 어둠 속에 묻혀 있다며 그림값을 지불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림 속 사람들의 각자의 얼굴에 대한 값을 지불하던 때다.


포토샵이라도 했어야 했다. 뽀샤시 효과라도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예술가의 혼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메시지를 담으려 했고, 어쩌면 사람들의 속내를 명암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의도를 사람들은 알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얼굴이, 모습이 어둡게 나왔음을 불평했다.


혹평이 쏟아지며 그의 그림을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고 더 이상의 의뢰도 없었다. 그의 자화상이 급속도로 초라해지게 된 계기다. 역시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이 작품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직도 많은 오해와 잘못된 정보가 이를 호도한다.


- 원제목은 '야경꾼'이 아니다. [프란스 반닝 코크와 빌럼 반 루이텐부르크의 민병대]다.
- 밤을 그린 것이라 하지만 낮을 그린 그림이다. 민병대장의 팔 그림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유화의 오랜 세월로 인한 퇴색이 그림 전체를 어둡게 보이게 해 Night Watch로 알려지게 되었다.
- 깃발을 든 사람 뒤에 베레모를 쓴 키 작은 사람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인다.
   주름은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 그의 자화상이다.
- 설상가상. 그의 사랑하는 첫 번째 아내 사스키아가 같은 해 사망한다. 허리춤에 닭을 매고 있는 소녀가 밝게 빛나고 있으며 사스키아의 얼굴과 닮았다는 설이 억지스럽지 않다.
- 렘브란트는 외면보다 내면에 대한 고민을 더 하게 되었다. 그래서 빛과 어두움으로 그것을 그려내려 했다. 어둠 속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된 자신이 싫었다. 더불어 현실적인 것보다 많은 메타포와 메시지를 녹아내게 했던 그에 대한 어떤 사람들은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그림은 3번의 습격을 받는다. 1911년 해군에서 해고된 요리사가 칼로, 1975년 은퇴한 교사가 또다시 칼로 그림의 중간을 벤다. 마지막으로 1990년 무직의 범인이 황산을 끼얹고 만다. 그 사람들은 그림 속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무엇이 싫었고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어떤 것이 그들을 찔리게 하여 그러한 짓을 하게 한 걸까? 과연, 렘브란트 그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표현한 것일까?
네덜란드 국립 중앙 박물관의 Night Watch
[좌][우] 모두 1640년의 자화상, Night Watch를 그리기 2년 전


"인생의 전성기"


초상화의 대가로 알려진 '자본주의 화가'. 왕정이나 교회의 의뢰를 받던 화가와는 달리 그는 귀족이나 개인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명성과 부를 얻었다. 1634년엔 사랑하는 첫 번째 아내 사스키아와 결혼한다. 지방 도시의 시장이자 판사 딸과의 결혼이었다. 33세대 대저택에서의 생활은 호화로운 미술품과 골동품을 향유하기에 어색하지 않은 그것이었다. 일과 사랑, 부와 명예를 함께한 최고의 시절이었다. 그는 이미 1632년부터 '튈프 박사의 해부' 그림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얼굴에 주름은 찾아볼 수가 없다. 얼굴은 분이라도 바른 듯 뽀얗고 하얬으며,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귀족적인 느낌은 옷매무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유로운 얼굴로부터였다.

[좌] 1635년 [중] 1634년 [우] 1632년


"꿈을 좇는 젊은이"


1624년 개인 아틀리에를 연 그는 '자본주의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는 14살이 되던 1620년 레이든 대학으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기로 한 그때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그는 영락없이 꿈을 좇는 젊은이었다. 마치 그의 인생에 있어 두 번의 전환기를 가져다 줄 어느 아이러니한 걸작을 그려낼 것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좌] 1630년 자화상 [우] 1629년 자화상
[좌] 1629년 자화상 [우] 1628년 자화상




"그에게 묻고 싶다.
다시 태어나도 그 그림을 그릴 것인지"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영어 발음:; 이탈리아어: [kjarosˈkuːro])는 명암의 대비 효과를 사용하여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3차원적인 물체나 사람을 묘사할 때 입체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명암의 효과를 사용하는 것에 사용되기도 한다. 사진술이나 영화 제작에서도 명암법이라는 말이 쓰인다.

-위키백과-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날리던 그가 외면보다 내면에 좀 더 집중을 하게 된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날리던 바로 그 때다. 그는 자화상과 신화, 그리고 종교에 심취하며 '키아로스쿠로'에 탐닉하게 된다.


사물을 생략하고 내면을 암시하는 것. 인간의 느낌과 감성, 불확실한 것들, 규정하기 힘든 것, 무한한 꿈과 이성을 그림 속에 붙잡기 위해 그는 '빛과 어두움'을 수단으로 삼았다. 그가 본 것, 느낀 것, 표현하려 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잘 나가던 초상화가가 대중들과 멀어지고, 경제적인 파탄을 감수하고서까지 그림을 그렇게 그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은 사람들이 몰라주지만, 자신이 죽고 난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받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눈 감는 것을 감수한 것일까?


젊은 시절 뽀얗던 얼굴과 귀족적 아우라를 뽐내던 그가, 갈수록 초라해지는 자화상을 그릴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Night Watch를 그래도 그렸을까? 그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 보건대 나는 잘 모르겠다. 행복했던 시간과 잘 나가던 그때에 왜 내면에 집착하여 힘든 삶을 선택했을까?




"그러니까요, 렘브란트. 이 글을 한 번 아래에서 위로 읽어봐요. 갈수록 초라해지는 당신의 자화상. 그대도 당신은, 다시 태어나도 그 그림을 그릴 건가요?




렘브란트 광장의 렘브란트
렘브란트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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