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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31. 2016

네덜란드 동성애 이야기

Everyone's gay in Amsterdam

1997년 가을.
충격적인 커밍아웃.


1997년이었다. 그리고 가을이었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난 가장 친한 내 친구 녀석과 라면을 끓여먹고 TV를 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줄곧 나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꼬리표를 달고, 내게도 녀석과 같은 꼬리표가 있던 말 그대로 베프였던 녀석. 그런 녀석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했다. 자기 너무 힘들다고. 정체성에 혼란이 왔고 아무래도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다행히 그 '남자'에 내가 포함이 되지 않아 우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홍석천 씨가 커밍아웃을 해서 대한민국을 들썩하게 만들기 딱 3년 전 일이었다. 그러니 친구 녀석의 고백을 들었을 때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문화충격은 기본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의 고민을 몰랐다는 데에 대한 미안함과 그동안 솔직히 말하지 않은 녀석에 대한 아쉬움이 한데 뭉쳐졌기에. 3년 후, 홍석천 씨가 커밍아웃으로 대한민국을 들썩하게 만들었을 때, 그래서 난 들썩이지 않았다.


2001년 4월 1일.
세계 최초 동성애 부부 탄생 in Amsterdam


가장 친한 친구의 개인적인 커밍아웃. 유명 연예인의 공개적인 커밍아웃이 있었던 그 때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네덜란드에서는 암스테르담 시장의 주례 하에 '합법적'인 동성부부 4쌍이 탄생했다. 2001년 4월의 일이었고, 이 날은 동성결혼이 세계 최초로 '합법화'된 날이었다. 이제 막 동성애가 담론화 되고 사회적 이슈로 떠오를 그즈음에 네덜란드에서는 그들의 결혼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심지어 그들은 아이들을 입양해 키울 수도 있었다. 먼저는 네덜란드 내에서의 입양이 가능했고, 2005년에는 해외입양까지도 허락이 되었다.

(2000년 9월 커밍아웃과 동시에 사회에서 매장되다시피 한 홍석천 씨는 이 결혼식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분이 어땠을까.)


1호 커플. [이미지 출처: http://www.freedomtomarry.org]


네덜란드 "Gay Pride Parade"가 탄생하기까지


8월의 암스테르담은 참으로 활기차다. 갖가지 퍼레이드와 축제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8월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Gay Pride Parade"다. 어느 곳에서는 금기시하는 이 주제를 가지고 합법화는 물론 퍼레이드에 축제까지 즐긴다고 하니 과연 '자유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덜란드도 처음부터 동성애에 대해 그리 관대했던 건 아니다. LGBT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운동이 일어난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또 어떤 역사의 시기에는 동성애로 사형까지 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암스테르담 운하는 그들이 접수한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즐기는 사람들.
도시 곳곳은 클럽이 되어 들썩 거린다.
그들의 즐거움이 느껴진다. "이건 모두를 위한 축제야"라고 말하는 듯이.




18세기와 19세기를 아우르는 1730년부터 1811년까지는 동성애자들에게 있어 암흑의 시대였다. 동성애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항문성교를 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 풍기문란 죄로 기소되고 처벌받았다. 특히, 미성년과의 행위나 동성 성폭행은 엄히 다스려졌다. 웃지못할 정도로 흥미로운 것은 이성 간의 항문 성교나 동물과의 관계는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여자와 여자의 결혼은 사기죄로 철창신세를 져야만 했다. 1730년엔 Utrecht 법정에서 수백 명의 남자들이 기소되었고, 이 중 약 300명에 달하는 남자들이 처형되기도 했다.


1777년 익명의 잡지에서 동성애에 대한 담론이 시작되었다. 동성애 금지법에 대한 반기를 들었는데, 그 이유가 재밌다.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 다만 '반사회적인 행위'로 교육을 통해 고칠 수 있는 현상이라 언급되었다. 더불어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알키비아데스 간에 일어난 동성애를 탐구하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즉, 편견에 가려 있지 말고 그 시대 사람들도 남자 간의 진한 우정이 있었고, 또 정신적으로도 사랑할 수 있음을 인정해달라는 아우성이었다. 이러한 작은 움직임에 힘입어 기소되는 사람들은 늘어갔지만 그 형벌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1810년에 홀랜드 주는 동성애 금지법을 폐지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선 1911년. 동성애가 가능한 나이가 21세로 상향되었다. 이성애가 가능한 나이는 16세로 지정된 때였다. 그리고 이때 최초의 'Gay bar'가 문을 연다. 'The Empire'라는 이름으로 1930년까지 운영했다. 이곳에서는 최초의 'Gay magazine'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름은 영어의 'We'를 뜻하는 'Wij'였다.


이렇게 활발해만 갔던 동성애의 흐름도 2차 세계대전을 피해가진 못했다. LGBT 운동을 실시했던 많은 기관들이 나치에 의해 문을 닫아야 했다. 그리고 독일은 동성애를 심하게 금지했다. 1945년에 이르러, 세계 많은 나라가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을 그때 '동성애' 운동 또한 해방을 맞이하고 부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정신학회와 신학자들은 동성애를 '소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질병'으로 규정했다.


1971년에 이르러 네덜란드 정신학회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규정하는 것을 멈추게 된다. 개인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분수령이었다. 1983년 에이즈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을 때는 암스테르담 시의 적극적이고 발 빠른 교유과 대처로 감염률을 낮추기도 했다. 이러한 질서 아닌 질서 속에 동성애는 자리를 잡아가고, 마침내 1987년 세계 최초로 동성애를 기념하는 기념물까지 탄생하게 된다.

Homomonument in Amsterdam [이미지 출처: Wiki]


1993년 네덜란드 국회는 '동성애자'들의 평등을 보장하는 법을 제정하여 공표하게 된다. 동성애로 인해 차별받지 않으며, 이성애자들과 다르지 않은 혜택을 보장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1998년에는 결혼 전 단계인 '파트너십'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유화를 기념하기 위며, 마침내 그렇게 'Gay Pride Parade'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Everyone's gay in Amsterdam


네덜란드 사람들의 유쾌함은 남다르다. 함께 일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의 흥에 함께 겨워지고 만다. 그래서 그들은 '동성애' 코드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 과연 그들 답다. 우리나라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어쩌면 우리네에겐 금기시되고 숨기고 싶은 것을 그대로 내놓다 못해, '자유의 코드'로 활용하는 '흥'을 발휘한 것이다. 사실, 'Gay'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흥겨움', '유쾌함'임을 감안할 때 어쩌면 우리 눈 앞에는 새까만 안경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모두가 즐겁다는 이 말은,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남녀노소 불문하고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도시라는 것을 여실 없이 말해주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암스테르담 거리를 거닐다 보면 이 문구가 마음에 쏙 들어와 자리 잡는다. 그 날은, 암스테르담을 자유롭게 거니는 모든 이는 'Gay'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함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009년 발행 및 시행된 네덜란드 관광부 Catchphrase (그들의 유쾌함이 남다르다.)


이처럼 오랜 네덜란드 '동성애'에 대한 역사(?)와 흐름의 이야기는, '동성애'가 맞다 틀리다의 담론을 넘어 철저하게 '개인'의 행복과 선택권을 향한 갈구함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삐져나오는 개인의 '욕구'나 '바람'을 사회나 공동체의 잣대와 기준에 맞추어 가리기에 급급한 우리네와는 참 다른 모습이다. 물론, 네덜란드의 그 모든 것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우리네의 역사적 배경이 있고 집단적 정서가 있다는 것을 절대 부정해선 안된다. 그래서 어쩌면 네덜란드보다 느린 것일 뿐. '선진국'은 말 그대로 먼저 간 나라다. 먼저 갔다고, 먼저 경험했거나 제도가 마련되었다고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선진국'인 네덜란드나 다른 나라를 잘 관찰하여 우리네에게 맞는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절대적이고 주관적인, 개인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집단 내에서 비교하고 비방하는 우리의 모습을 조금 반성해보면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란 생각이다.


모두가 그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 덧붙임 -


몇 가지 재미있는 정보들 (출처: Wiki 백과)


- 2000년 동성 결혼을 위한 하원 투표에서 찬성 109표, 반대 33표로 법이 아래와 같이 개정되었다.

Een huwelijk kan worden aangegaan door twee personen van verschillend of van gelijk geslacht. (결혼은 이성의 혹은 '동성'의 두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 네덜란드 통계청에 따르면 동성결혼이 허용된 첫 6개월간 전체 결혼 중 동성결혼이 차지하는 비중은 3.6%로, 2,100여 명의 남성과 1,700여 명의 여성이 결혼하였다. 2004년 6월까지 총 6,000여 건의 동성결혼이 신고되었다. (작가 주: 보통 '동성애'하면 남자 커플이 주목을 받는데, 실제로는 여성 결혼자 수가 더 많다.)


- 2006년 3월 네덜란드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01년에 신고된 동성결혼은 2,500여 건, 2002년 1,800여 건, 2004년 1,200여 건, 2005년 1,100여 건이다.


- 2001년부터 2011년까지 14,813쌍의 동성 커플이 결혼하였고, 이 중 7,522쌍은 여성 커플, 7,291쌍은 남성 커플이다. 같은 기간 동안 이성 결혼은 761,010건으로 집계되어, 전체 결혼 중 동성결혼의 비율은 1.95%이다. 또한 이들 중 7.28%인 1,078쌍의 동성부부가 이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 2013년 5월 실시된 Ifop 여론조사에 따르면 85%의 네덜란드 유권자가 동성 결혼과 동성 부부의 입양권에 찬성하고 있다고 나타났다. (작가 주: 반대로 15%의 반대자 중에는 동성애에 대해 혐오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며, 매 년 70여 건의 동성애 혐오 폭행 사고가 일어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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