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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인 척 살아가는 하루

<스테르담 마음 에세이>

by 스테르담

버겁다.

겹겹이 쌓인 가방을 멘 것처럼. 그 안에 돌덩이든 뭐든 무지막지하게 무거운 무언가가 들어있는 것처럼.


어려서는 중력의 무게만 감당하면 되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그 체중을 감당하는 건 그리 힘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빨간색 보자기를 매고, 몇 미터가 되는 장독대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도 했었다. 슈퍼맨이 별거인가. 빨간 망토만 있으면 어느 누구나 슈퍼맨이 될 수 있던 나이였다.


버거운 삶이 시작된 건, 아마도 유치원 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회생활. 나만이 아닌 누군가와의 부대낌. 타인과 나의 마주침은 그리 긍정적인 서사의 시작이 아님을, 그땐 알지 못했다. 이어지는 학창 시절은, 어른들은 낭만이라 말하였지만 기억에 남는 건 늘 경쟁과 시험 그리고 성적이었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먼지보다 작은 것들이 등수를 매기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데, 그 '짓'이 삶의 전부라니. 땅바닥에 있는 개미를 두고, 우리는 어떤 개미가 상위 몇 %에 속하는지를 알 수 없고 또 의미도 없다.


솔직히 난, 반백 년을 살고 있지만 아직도 어른이란 게 믿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른'이란 타이틀은 내가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찌 보면 강제로 써지는 무엇이다. 물론, 철없던 어린 시절... 어른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을 동경하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는 (끔찍한) 생각을 했던 걸 돌아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정신 차리라며 내 뺨을 후려치고 싶을 정도다.


'어른'이란 말은 '책임'을 동반한다.

어렸을 때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결국 '책임'의 부재에 기반한 발상이었다. 좋은 것만 취하려는 바람.


그렇다면 대체 나는,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될 수 있는 걸까.


누군가 말했다.

어른이 되는 순간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라고.


나는 말한다.

책임의 무게가 자아보다 비대해지면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내 책임의 무게는 이미 자아보다 비대하다.

그리하여, 자아를 부정하는 일도 벌어진다.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내가 아닌 척 연기를 해야 하며, 간과 쓸개를 (마음속) 전용 냉장고에 넣고 다녀야 한다.


좀 궁금하다.

그런데, 정말... 진정한 어른이 있기는 한 걸까? 책임의 무게가 무거워도, 다들 마음 한 편엔 어리광을 품고 있지 않을까. 책임이 사라지고, 경쟁이 사라지고, 타인과의 부대낌이 사라지면... 나와 그들 모두는 지금 같은 모습일까? '어른'이란 단어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까?


어른인 척 살아가는 하루.

연기자는 연기에 몰입한다.

우리는 우리 삶에 몰입해야 한다.


어른인 척.

메서드 연기.


나와 우리의 연기에, 삶에... 어른 인척하는 모든 몸 사위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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