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chitecture of Fate
우리는 삶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고 믿는다. 혹은 반대로 정해진 운명의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라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고대의 중국인들은 이 혼돈스러운 세상의 소스 코드(Source Code)를 이미 3천 년 전에 해독했다. 그들은 세상을 ‘음(陰)’과 ‘양(陽)’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이진법(Binary Code)으로 환원했다.
0과 1. 음과 양.
이 단순한 비트(Bit)가 세 개 모이면 8괘가 되고, 여섯 개가 모이면 64괘가 된다. 『역경(易經)』. 그것은 점술서가 아니라, 우주를 구성하는 64가지 상황(Situation)에 대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다.
인생은 결국 ‘쌍륙(雙六) 놀이’와 같다. 말들은 64개의 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보드 위를, 주사위의 눈금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건(乾)’의 칸에서 하늘을 날다가 ‘곤(坤)’의 칸에서 땅을 기고, ‘비(否)’의 칸에서 막혔다가 ‘태(泰)’의 칸에서 뚫린다. 우리는 서로 다른 순서로 칸을 밟을 뿐, 결국 이 64가지의 ‘상황’ 안에서 순환한다.
이것은 자신의 인생이 ‘오류(Error)’로 점철되었다고 믿었던 한 남자가 길거리의 기묘한 ‘프로그래머’를 만나, 운명이라는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다시 배우게 된, 어느 늦가을 오후의 기록이다.
1. 서문시장의 소음, 그리고 기이한 데이터
오후 3시. 대구 서문시장.
이곳은 거대한 에너지의 용광로였다. 좁은 통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어깨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상인들의 호객 소리, 기름에 튀겨지는 호떡 냄새, 멸치 육수의 비릿하고 구수한 냄새, 그리고 수만 가지 물건들이 뿜어내는 먼지 냄새.
김경훈은 보보의 손을 꼭 잡고, 이 감각의 폭풍 속을 걷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안내견 탱고가 바닥에 떨어진 어묵 꼬치 냄새의 유혹을 필사적으로 참아내며(녀석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의 안전을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장 구석의 명물인 ‘납작만두’를 먹으러 온 길이었다. 김경훈의 입가에는 떡볶이 국물이 묻어 있었고(보보가 닦아주었다), 표정은 유쾌했다. 그는 15년의 시각적 기억 속에 있는 서문시장의 활기찬 색감들을, 지금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에 덧입히고 있었다.
“자, 이제 가자. 너무 시끄러워서 정신이 없네.”
보보가 그의 팔을 끌었다. 그들이 시장의 외곽, 한약재 냄새가 진동하는 조용한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거기, 검은 안경 쓴 젊은이.”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마치 수천 년 동안 바싹 마른 대나무가 바람에 스치는 듯한 소리. 그것은 김경훈의 귀에, 단순한 호객 행위가 아닌, 어떤 명확한 ‘신호(Signal)’로 감지되었다.
김경훈은 걸음을 멈췄다. 탱고도 동시에 멈춰 섰다.
“저요?”
“그래. 자네. 그리고 자네 옆에 있는 그 눈 밝은 처자랑, 털북숭이 짐승도.”
그들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경훈은 귀를 기울였다.)
그곳에는 돗자리 하나를 펴놓고 앉은 노인이 있었다. 김경훈은 그의 냄새를 맡았다. 오래된 먹물 냄새, 곰방대에서 나오는 쑥 타는 냄새, 그리고 기묘하게도… 빳빳한 새 지폐 냄새가 섞여 있었다.
“누구세요?” 보보가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도원(道元)이라 하네. 길가에서 도(道)를 줍는 늙은이지.”
2. 6비트의 우주, 혹은 이진법의 철학
도원 노인은 그들을 자신의 돗자리 앞으로 불렀다.
“자네, 컴퓨터 좀 만지는가 보구만.” 노인이 대뜸 김경훈에게 물었다.
“...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네 걷는 게 딱 그래. 0 아니면 1이지. 머뭇거림이 없어. 보이지 않으니, 확실한 데이터가 아니면 발을 떼지 않는 거지. 아주 훌륭한 ‘디지털’ 보행법이야.”
김경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디지털 보행법’이라니. 이 노인, 범상치 않다.
“그래서요? 제 관상이라도 봐주실 겁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제 얼굴도 기억이 안 나서요.” 그가 짐짓 짓궂게 대꾸했다.
“관상은 무슨.” 도원 노인이 혀를 찼다. “얼굴은 껍데기야. 나는 ‘패턴’을 보지. 자네,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하지? 중학생에 세상이 한번 뒤집어졌으니.”
김경훈의 미소가 굳어졌다. 보보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걸… 어떻게….”
“놀랄 것 없어. 자네 미간에 써 있거든. ‘나는 억울하다’고.” 노인이 킬킬거렸다. “하지만 억울해할 것 없어. 자네는 그저, 64개의 방 중에서 조금 험한 방에 먼저 들어갔다 나온 것뿐이야.”
“64개의 방이요?”
“그래. 『역경(易經)』 알지? 주역 말이야.”
노인은 주머니에서 엽전 세 개를 꺼내 짤그랑거리며 던졌다.
“세상은 음(0)과 양(1)으로 되어 있어. 이게 세 번 모이면 소성괘, 여섯 번 모이면 대성괘가 되지. 2의 6승. 64가지의 경우의 수. 그게 우리네 인생의 전체 설계도야.”
김경훈의 뇌가 ‘연구 모드’로 전환되었다.
“2의 6승… 64비트가 아니라 6비트 시스템이군요.” 그가 중얼거렸다. “고작 6비트로 우주를 설명한다고요?”
“고작이라니!” 노인이 호통을 쳤다.
“이 64개의 괘(卦) 안에는 탄생부터 죽음, 성공과 실패, 전쟁과 평화, 사랑과 이별이 다 들어있어. 자네가 겪은 그 ‘어둠’도, 그중 하나인 ‘명이(明夷)’ 괘일뿐이야. ‘밝음이 땅속에 갇혀 상처받는 형상’. 하지만 명이 괘 다음에는 반드시 다시 밝음이 오는 법이지.”
김경훈은 전율했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시스템의 치명적인 ‘버그’나 ‘오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노인의 관점에서 그것은 그저 시스템 안에 이미 프로그래밍된 64개의 ‘상태(State)’ 중 하나일 뿐이었다.
3. 쌍륙놀이의 말, 혹은 시스템의 사용자
“결국 인생은 쌍륙(雙六) 놀이 같은 게야.”
도원 노인이 말을 이었다.
“말(Horse)들은 주사위가 나오는 대로, 이 칸 저 칸을 옮겨 다니지. 어떤 놈은 ‘성공’ 칸에 먼저 가고, 어떤 놈은 ‘실패’ 칸에 먼저 가. 하지만 결국 한 바퀴 다 돌고 나면 똑같아. 순서만 다를 뿐, 우리 모두는 이 64가지 상황을 두루 겪으며 사는 거야. 자네가 지금 겪는 고통? 남들은 나중에 겪거나, 이미 겪은 거야. 자네만 억울한 게 아니라고.”
그는 김경훈의 발치에 있는 탱고를 가리켰다.
“저 개를 봐라. 저놈은 지금 자네라는 ‘운명’에 묶여서 개로서는 겪기 힘든 ‘인내’의 칸에 머물고 있지. 하지만 저놈이 불행해 보이나? 아니야. 저놈은 그 칸 안에서 자네를 지킨다는 자기만의 ‘길(道)’을 찾은 거야.”
탱고가 노인의 말에 대답하듯, 꼬리를 탁탁 쳤다.
김경훈은 문득, 자신이 ‘불운’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저 ‘변수(Variable)’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그럼 어르신.” 김경훈이 물었다. “제 다음 칸은 뭡니까? 다시 ‘빛’을 보게 됩니까?”
“그건 자네가 던질 동전에 달렸지.” 노인이 껄껄 웃었다. “점을 친다는 건, 미래를 정하는 게 아니야. 지금 내가 어떤 칸에 서 있는지, ‘현 위치’를 파악하는 거지. 자네가 지금 ‘어둠’ 칸에 있다면, 다음은 필연적으로 ‘변화’가 올 테니까. 대비하라는 거야. 쫄지 말고.”
노인은 돗자리를 털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돈은 됐네. 대신, 자네 옆에 그 아가씨한테 잘해. 자네 인생의 64개 칸 중에서 가장 빛나는 ‘화천대유(火天大有)’ 같은 존재니까.”
4. 65번째 비트, 혹은 사랑이라는 오류
그들은 도원 노인을 뒤로하고, 다시 시장 골목을 빠져나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김경훈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자기야.” 보보가 그의 팔을 꼭 잡으며 물었다. “아까 그 할아버지 말, 어떻게 생각해? 인생이 정해진 64개의 칸을 도는 게임이라는 거.”
김경훈은 잠시 생각했다. 그는 15년의 기억과, 그가 배운 모든 학문적 지식을 동원해 이 ‘운명의 아키텍처’를 분석했다.
“글쎄. 논리적으로는 완벽해. 0과 1의 조합. 모든 상황의 시뮬레이션. 그런데 말이야.”
그는 걸음을 멈추고, 보보를 마주 보았다.
“그 64개의 시스템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어.”
“그게 뭔데?”
“당신.”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시력을 잃은 건, 그래, ‘명이’ 괘라고 치자. 내가 공부를 한 건 ‘대축’ 괘고. 하지만… 당신을 만난 건, 그 어떤 괘로도 설명이 안 돼. 확률적으로 불가능해. 미국에서 10년 살다 온 철학 박사가 대구의 시각장애인 연구원을 만나서 서문시장에서 납작만두를 먹고 있다? 이건 시스템의 ‘버그’야. 64비트를 넘어선, 65번째 비트라고.”
보보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게. 나를 ‘오류’ 취급하는 거야?”
“아니.” 김경훈이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따뜻한 피부를, 그 살아있는 ‘실존’을 감각했다.
“오류가 아니라… ‘기적’이지. 시스템 바깥에 존재하는 유일한 해답. 도원 노인은 인생이 쌍륙놀이 말판이라지만, 나는 당신이라는 ‘주사위’를 얻었어. 그러니까 나는 어떤 칸에 떨어져도 상관없어. 당신이랑 같이 서 있을 테니까.”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서문시장의 소음도, 11월의 추위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65번째 칸, ‘사랑’이라는 이름의 영토 위에 서 있었다.
5. 주석: 운명의 아키텍처
‘제목: 운명의 아키텍처, 혹은 6비트의 위로.
인생은 불역(不易, 변하지 않음)의 상황들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시뮬레이션이다. 64개의 괘. 우리는 그 안에서 울고 웃는다.
나의 장애는 ‘불행’이라는 고정값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인생이라는 게임의 한 ‘스테이지’였을 뿐이다.
도원 노인은 말했다. 변화를 겪는 차례가 다를 뿐, 운명은 하나라고.
결론: 나는 내 운명의 아키텍처를 긍정한다. 어둠의 칸을 지났기에, 빛의 소중함을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 시스템의 ‘치명적인 버그’, 보보를 만났다. 그녀는 내 인생의 모든 논리를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꽃을 피운다. 나는 기꺼이 이 오류투성이 시스템의 사용자가 되겠다.
… 내일은 탱고에게 특식을 줘야겠다. 녀석도 ‘인내’의 칸을 지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