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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의 환기 Ep.4

by 김경훈


에피소드 4. 부재중인 주인의 방



"과호흡입니다. 엘리베이터 갇힘 사고로 인한 일시적인 공황 발작이에요."


응급실 의사의 진단은 건조했다. 보영은 산소호흡기를 쓴 채 눈을 깜빡였다. 시야 끝에 현우가 서 있었다. 그는 젖은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친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의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보호자분이 응급처치를 잘하셨네요.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할 뻔했어요."


의사의 칭찬에 현우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보영은 혼란스러웠다. 어둠 속에서 느꼈던 그 축축한 손길, 귓가에 들리던 물소리, 그리고 '내 거야'라는 섬뜩한 목소리. 그 모든 게 단지 산소 부족이 만들어낸 환각이었을까?


"보영 씨, 괜찮아요?"


현우가 다가왔다. 그의 목덜미를 살폈다. 붉은 멍 자국은 셔츠 깃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서 나던 물비린내도 병원의 소독약 냄새에 묻혀 희미해져 있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에요. 저야말로 미안하죠. 괜히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퇴원 수속을 마치고 나왔을 때, 밖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기세였다. 보영은 택시를 부르려 핸드폰을 켰다.


그때, 관리실에서 온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와르르 쏟아졌다.


[805호 입주민님, 긴급 상황입니다. 옥상 배수관 파열로 8층 세대 전체 침수되었습니다. 누전 위험으로 단전 조치했으니 귀가하지 마시고...]


보영은 망연자실했다. 빗소리가 이명처럼 윙윙거렸다. 물이 또다시 물이 그녀의 쉴 곳을 앗아갔다. 마치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으려는 듯이.


"무슨 일 있어요?"


현우가 물었다. 보영은 힘없이 문자 내용을 보여주었다. 현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런... 당장 갈 곳은 있어요?"


"근처 찜질방이나 모텔이라도 가야죠."


"이 몸 상태로요? 안 돼요. 그러다 또 쓰러져요."


현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잠시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더니, 백미러로 보영을 보며 말했다.


"보영 씨, 불편하겠지만 오늘 하루만 우리 집에서 지내요."


보영이 놀라 손사래를 치려 하자, 현우가 급히 덧붙였다.


"이상한 뜻 아니에요. 집에 민서랑 저밖에 없어요. 그 사람(아내) 나간 뒤로 방 하나가 비거든요. 민서도 보영 이모 보고 싶어 하고... 이런 날씨에 혼자 모텔 보내는 건 도저히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요."


'집에 저랑 민서밖에 없어요.'


그 말이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괴물 같은 아내가 없는 집. 그리고 민서가 있는 곳. 적어도 침수된 오피스텔이나 낯선 모텔보다는 안전해 보였다. 무엇보다 현우의 눈빛은 너무나 선량하고 절박해 보였다.


"... 정말 민서랑 과장님만 계시는 거죠?"


"그럼요. 그 사람은 접근 금지라니까요. 얼씬도 못 해요."


결국 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의 집은 교외에 있는 2층 단독주택이었다. 빗속에 서 있는 집은 거대한 회색 돌덩이처럼 보였다. 담벼락을 타고 자란 담쟁이덩굴이 빗물을 머금고 축 늘어져 있었다.


"들어와요. 좀 눅눅할 거예요. 비가 와서."


현우가 도어록을 열었다. 띠리릭.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훅, 하고 끼쳐오는 냄새가 있었다. 오래된 종이가 젖은 냄새, 곰팡이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섞인 물비린내. 사무실에서 현우에게 맡았던 그 냄새였다.


"아빠!"


민서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아이를 보자 보영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민서야, 인사해. 보영 이모야. 오늘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갈 거야."


"안녕하세요..."


민서가 보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아이의 표정이 묘했다. 반가움보다는 두려움, 혹은 경계심이 서려 있는 눈빛이었다. 민서는 보영의 뒤, 정확히는 열린 현관문 밖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아빠... 엄마는?"


그 질문에 현관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현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엄마는 안 온다고 했잖아. 다신 안 온다고."


현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민서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현우는 곧바로 표정을 풀고 보영을 향해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은 어색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애가 아직... 적응을 못 해서. 2층 안쪽 방 쓰시면 돼요. 원래 서재로 쓰던 방이라 깨끗해요."


보영은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넓고 쾌적했지만, 역시나 눅눅한 기운이 감돌았다.


현우가 챙겨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밖에서는 여전히 천둥 번개가 치고 있었다.


'별거 중이라고 했지. 민서랑 둘이 산다고.'


보영은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현우의 태도는 확실했다. 그는 아내를 싫어하고, 아이를 보호하려 한다. 아까의 예민한 반응도 그 때문일 것이다.


똑똑.


"이모."


방문이 살며시 열리고 민서가 들어왔다. 손에 우유 한 잔을 들고 있었다.


"아빠가 이거 드시래요. 따뜻한 거."


"고마워, 민서야."


보영은 우유를 받아 들고 민서를 침대에 앉혔다. 아이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온기가 있는 존재였다.


"민서야, 아빠랑 둘이 사는 거 안 심심해?"


보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민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데 이모... 아까 거짓말했어."


"응? 무슨 거짓말?"


"아빠랑 둘이 사는 거 아니야."


보영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가... 집에 와?"


민서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겁에 질린 눈으로 방문 밖, 굳게 닫힌 맞은편 방문을 가리켰다. 안방이었다.


"엄마는 안 와. 근데... 밤마다 아빠 방에서 소리가 나."


"무슨 소리?"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랑... 아빠가 누구랑 이야기하는 소리. 아빠는 혼잣말이라고 하는데, 아니야. 분명히 다른 여자가 있어."


보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민서가 보영의 소매를 꼭 잡았다.


"그리고... 아까 이모 들어올 때 봤어?"


"뭘?"


"현관문에... 젖은 발자국."


"발자국?"


"응. 이모랑 아빠는 신발 신고 들어왔는데, 그 뒤에... 맨발자국이 찍혀 있었어. 아주 작고, 축축한 발자국."


그때였다. 거실에서 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서야? 이모 쉬시게 나와야지."


다정한, 너무나 다정한 아빠의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는 방문 바로 앞에서 들렸다. 언제부터 와서 듣고 있었던 걸까.


민서가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이가 나가고 방문이 닫혔다.


보영은 홀로 남겨졌다. 적막이 흘렀다.


민서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둘이 사는 게 아니야.'


보영은 불안감에 방 안을 둘러보았다. 서재로 썼다던 방. 책장에는 책들이 빼곡했다. 그런데 책장 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액자 하나가 엎어져 있었다.


보영은 홀린 듯 다가가 액자를 일으켜 세웠다.


웨딩 사진이었다. 턱시도를 입은 현우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 현우의 아내, 혜진이었다.


사진 속의 혜진은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 부분만 물에 젖은 것처럼 쭈글쭈글하게 울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 부분에만 물을 계속 떨어뜨린 것처럼.


그리고 사진 밑에, 누군가 빨간 펜으로 휘갈겨 쓴 글씨가 보였다.


[ 숨지 마 ]


그 순간, 보영의 등 뒤에서 툭,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천장이었다. 천장 한가운데서 물방울이 떨어져 보영의 베개 위를 적시고 있었다.


보영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벽지에 검은 얼룩이 점점 번져나가고 있었다. 2층인 이 방의 위는 옥상일 텐데.


아니, 옥상이 아니었다. 빗소리에 섞여 천장 위에서 들리는 소리.


쿵. 쿵. 쿵.


누군가 위층에서 정확히 보영의 머리 위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천장을 타고 보영의 정수리 바로 위까지 다가오더니 멈췄다.


그리고 천장의 얼룩 속에서 젖은 머리카락 한 올이 스르르 뚫고 내려왔다.


(에피소드 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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