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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같던 하루, 다시 설레다

잃어버린 설렘을 색으로 되찾은 어느 날의 기록

by 비심플



0000000.png 잃어버린 설렘을 색으로 되찾은 어느 날의 기록.



전화가 울린다. 받기 싫다.

메일함 열어봐도, 카톡 알림 쏟아져도, 뭐 하나 손에 잡히질 않는다.

디자인 사이트를 열어 트렌드를 봤지만 예전처럼 흥분되지 않는다.



흥분? 기분? 그게 뭐지?

옷장 앞에서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결국 아무거나 주워 입는다.

머리는 대충 말린 채, 서브웨이에서 오징어처럼 주저앉아 있다가 다시 걸어간다.

커피 한 모금도, 아이디어 하나도, 오늘 하루를 견디게 할 힘이 없다.



아- 이름도 무심하다. 슬럼프.



회의실에 앉아 있어도, 화면에 띄워진 프로젝트 자료는 그냥 색종이처럼 펼쳐질 뿐.

손가락이 마우스를 움직이긴 하는데, 뭘 클릭해도 마음은 공중에 붕 떠 있다.


팀원들이 말 걸어도, “응-”만 던지고 다시 화면만 바라본다.

“응-”이라고는 했지만... 자꾸 말 걸지는 말아줄래?

내 캘린더, 엑셀 목록이 나를 비웃고 있다.

하루하루 심드렁한 나날들의 연속이다.

오징어로 살아가는 것도 지겹고

미쳐 폭발할 거 같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서 뭐라도 붙잡아 봐야겠다.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일단 나갔다.

그냥 걸었다. 초록이 보이는 곳 아무데나.

예전에 친구가 그랬다

우울할 때는 무조건 초록을 보라고.



걸으면서 나무들을 보니 디자이너 명함을 처음 받았던 순간, 프로젝트로 입상했던 순간,

진급했을 때, 팀원들이랑 삼겹살 먹으면서 깔깔 거리던 시절 등이

마구잡이로 스쳐지나갔다.



행복했었지. 힘들었지만 좋았는데 지금 왜 이런거지? 생각한다.

다시 자극받고 싶다. 설레고 싶다는 욕심이 솟아난다.

예전에 내가 신입이었을 때, 무엇이 좋았는지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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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알파문고로 향했다.

스케치북을 한 권 집어 들고, 형형색색의 펜들을 잔뜩 골랐다.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은 조금씩 설렘을 되찾았다.



백화점 패션 코너를 돌면서, 신입 디자이너처럼 경쾌하게 인사했다.

“팀장님, 새로나온 리플렛 좀 챙겨주세요~”

일부러 오바하며, 나 자신을 조금 들뜨게 만들었다. 기분이 조금씩 밝아졌다.



밤이 되면 침대에 기대어, 조명을 은은하게 켜고, 디퓨저에서 은은한 향이 퍼지도록 했다.

따뜻한 허브티를 한 모금, 스케치북을 펼쳤다.

펜을 잡고 선 하나, 색 하나씩 그어가며, 마음속에만 있던 생각들을 조금씩 꺼내었다.



어제와 오늘, 지쳐 있던 나 자신이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집중하고,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선 하나, 색 하나가 쌓이면서 마음도 조금씩 풀린다.

머릿속의 답답함이 선과 색으로 빠져나가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슬며시 떠오른다.



‘아, 이렇게 하면 재밌겠다’,

‘이 색 조합은 생각보다 좋네’,

‘이 스케치에 살짝 디지털 효과를 입히면…’

작은 생각들이 하나둘씩 모여, 내 안에서 조용한 설렘을 만든다.

한참을 그리고 나니, 눈앞의 스케치북이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가능성의 장이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틀려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움직였다는 사실, 그리고 손끝에서 시작된 즐거움이 마음까지 번졌다는 것.

그때 깨달았다.



슬럼프는 도망칠 대상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며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신호일 뿐이라는 걸.

나는 다시 한 번 프로젝트에 손을 대고, 작은 시도들을 이어간다.

아이디어가 폭발할 필요는 없다.



조금씩, 하지만 분명히 다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생겼다.

그날 밤, 스케치북을 덮고 조명을 끄며 생각했다.

‘설레는 하루는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이렇게 작은 실험에서 시작되는구나.’

슬럼프 속에서 찾은 설렘은, 이제 내일을 조금 더 기대하게 만든다.



다시 노트북을 켜고, 작은 아이디어 하나부터 정리했다.

완벽할 필요는 없고, 어제의 나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된다.



손끝에서 시작된 즐거움이 마음으로 번지며, 잊고 있던 열정이 조용히 깨어난다.

오늘의 작은 실험은 내일의 큰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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