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와 함께한 배움의 순환 기록
디자인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디자이너로서 첫 직장은 잡지사였다.
매일 세련된 애슬레저 오피스룩을 차려입고 출근했지만,
내 디자인 실력은 그렇게 멋지게 따라와 주지 않았다.
그래도 옆자리 짝꿍 사수는 늘 초짜인 나를 차분히 이끌어주려 애썼다.
샘플 파일 하나 던져주고 “요대로 앉혀봐” 해도 될 것을,
그녀는 ‘여기는 Helvetica Neue, 여기는 Futura,
왼쪽은 일러스트와 오른쪽은 이미지 배치’까지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디자이너 짝꿍이 생겼다고 감을 올리려 함께 그래픽 전시도 보러 다녔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꽤 다정한 선배였다.
그런데 디자인팀장님은 사수와는 전혀 달랐다. 초반에는 말도 거의 걸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회사에 적응해갈 무렵, 어느 날 아침 불쑥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비심플 씨, 퀴즈 하나 풀어볼래?”
‘퀴즈’라는 말에 귀가 번쩍 열렸다. 맞추면 사탕이라도 받을 것 같지 않은가.
“이 공간에는 세리프가 어울릴까, 산세리프가 어울릴까?”
또 어떤 날은,
“이 화면에 글자가 많은데, 가독성을 끌어올리려면 몇 단으로 나누는 게 좋을까?”
사수는 A부터 Z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면,
팀장님은 매일 새로운 퀴즈를 던져 나를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매일 아침 팀장님이 내던 퀴즈가
사실은 디자인 이론을 몸에 새기게 하는 훈련이었다는 것을.
사수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나는 실무를 ‘따라하기’로 배웠고,
팀장님의 퀴즈 덕분에 ‘스스로 생각하며, 고민하며, 그래서 찾아보며’ 이론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내가 후배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 두 가지 방식이 동시에 떠올랐다.
후배는 기본적으로 따라할 수 있는 샘플이 필요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혼자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나는 사수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도, 또 중요한 포인트에서는 팀장님처럼 질문을 던지려고 노력했다.
“이 상황에서 네가 클라이언트라면 어떤 디자인을 선택할 것 같아?”
“이 작업은 폰트가 아니라 레이아웃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후배가 잠시 멈춰 생각하는 순간, 그 표정이 예전의 내 모습 같아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받았던 배움을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게 흘려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조직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디자인은 혼자 잘한다고 빛나는 일이 아니다.
팀이 함께 성장할 때 비로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는 후배가 질문할 때 ‘왜 그걸 몰라?’라고 지적하기보다,
질문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누군가의 질문은 다른 사람의 배움이 되고, 그런 공기가 모여 건강한 팀 문화가 자라난다.
결국 후배를 키우는 일은 곧 나를 키우는 일이었다.
돌고 돌아, 그게 내가 받은 배움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