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형이상학을 위한 노트
달빛은 칸트의 선험적 직관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순수한 형식이다.
그 은빛 아래에서 모든 사랑은 현상학적 괄호 안으로 들어가 본질을 드러낸다.
나는 이 달빛을 통해 사랑의 지도를 그리려 하니, 이것이 가능한가?
공간을 점유하는 육체들
사이의 관계를 평면에 투영하는 일이 과연 사랑의 진위를 포착할 수 있을까?
사랑의 지도 제작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기획이다. 지도는 공간적 관계를 표상하지만, 사랑은 시간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달빛 아래에서 추억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의식이 재구성한 기억의 파편들이다.
후설이 말한 '지향성'처럼, 사랑은 항상 어떤 대상으로 향하지만 그 대상은 결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다.
프루스트가 마들렌 한 조각에서 겪은 무의식적 기억처럼, 달빛은 우리 안에 잠든 시간의 층위를 일깨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달이 지구의 그림자를 드리우듯, 사랑의 기억은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본질적 그림자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처럼, 사랑의 경험은 우리를 시간 속에 던져 넣는 근본적 계기다.
* 지도학적 아포리아 *
당신을 좌표로 표기할 때
지도의 축척이 무너졌다
1:1의 비율로 펼쳐본들
사랑은 측량 불가능한
비-공간의 영역이었다
오차 범위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근사치로만 사랑했구나
사랑의 지도 제작은 근본적으로 '타인의 문제'에 직면한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인의 얼굴처럼, 사랑하는 이는 결코 완전히 인식될 수 없는 초월적 존재다.
우리가 그리는 지도는 항상 자아의 투영일 뿐, 타인의 실재를 포착하지 못한다.
달빛 아래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본질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갈망이 빚은 초상일 뿐이다.
니체가 "너 자신이 되어라"고 말했을 때, 그 자신도 사랑의 변증법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사랑에서 진정한 자기실현은 오직 타인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달빛 지도는 이 역설적인 진리를 은유한다.
지도를 완성하려는 순간, 그것이 공허한 자아의 투사임을 깨닫게 되는 아이러니.
새벽이 가까워지자 달빛은 점차 희미해진다.
헤겔의 변증법처럼,
사랑의 진리는 항상 이중적이다.
우리는 동시에 지도 제작자이자 길 잃은 여행자다. 지도를 그리는 행위 자체가 길을 잃었다는 자각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 자각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진지한 시작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남은 달빛이 창가를 스칠 때, 나는 비로소 이해한다. 사랑의 지도는 완성되지 않을 때에만 진실이라는 것을.
그것은 항상 열려 있는 텍스트여야 하며,
모든 해석을 허용하는 우주적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달이 지고 새벽이 오면,
이 지도는 다시 무형의
가능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사랑도 그렇듯이.
#수필 #지도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