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시간 끝에 비로소 얻어지는 휴식, 혹은 성숙한 연륜 속에 배어 있
여름은 언제나 뜨겁고 무겁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뜨거움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이미 가을의 문턱은 발 아래로 열리고 있다.
오늘은 말복이 지나고 처서가 머무는 날, 더위의 기세가 서서히 꺾이고 들녘의 벼 이삭들이 누런 빛을 띠기 시작하는 시절이다.
인간의 삶 또한 계절처럼 흐르고, 이 흐름 속에서 우리는 더위와 추위, 시작과 끝, 성숙과 쇠퇴를 경험한다.
처서는 단순한 절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뜨거움이 지나간 자리에서 서늘한 바람이 깃드는 순간, 삶의 격정이 잦아든 뒤에 찾아오는 고요와도 같다.
고단한 시간 끝에 비로소 얻어지는 휴식,
혹은 성숙한 연륜 속에 배어 있는 내면의 평정과도 같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절기의 변화를 삶의 길흉과 운세에 비유했다. 뜨겁고 무거운 여름이 사라지듯, 인간의 욕망과 번뇌도 결국은 스스로 소멸하며 평온으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처서를 맞이한 옛 시인들은 흔히 고요한 산수와 더불어 인생의 무상함, 그리고 사색의 깊이를 노래하곤 했다.
處暑後晨行
白露生田際,
殘暑隱林中.
人心隨候變,
世事自無窮.
밭머리에 흰 이슬 맺히고,
숲 속에 숨어드는 남은 더위.
사람의 마음도 절기를 따라 변하고,
세상의 일은 끝없이 이어지네.
이 한시는 처서 무렵의 아침 풍경을 그리면서, 절기의 변화가 곧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인생을 관조하게 만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여름이 지고 가을이 오는 순간은 단순히
기후의 변동이 아니라, 삶의 시각을 전환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처서의 바람은 뜨겁던 낮의 땀방울을 식혀주고, 그늘에 앉은 사람에게는 잠시 숨을 고를 여유를 허락한다. 그러나 그 서늘함 속에는 또 다른 아쉬움이 서린다.
계절의 한복판을 지나며, 우리는 지나간 날들의 무게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순간들을 떠올린다.
여름날의 소란과 웃음소리, 그 속에 스며든 청춘
의 기운들은 서서히 멀어지고, 대신 성숙과 수확, 그리고 고요의 계절이 다가온다.
삶 또한 그렇다.
뜨거운 청춘의 한때는 결국 지나가고, 어느 순간 우리는 서늘한 성찰의 시절을 맞이한다. 젊은 날의 열정이 사라지는 자리에 남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깊이를 얻은 시선이다.
흘러간 계절이 그저 떠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길러내듯, 우리의 지나온 시간도 내면의 성찰을 길러낸다.
처서 무렵
서늘한 바람이 돌아온다
한낮의 땀방울 위에
가을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과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다
뜨겁던 여름의 소란은
이제 먼 기억으로 흐르고
고요한 들녘에
벼 이삭만이 고개를 숙인다
바람은 말한다
끝난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중이라고
이 시는 처서를 맞이하는 오늘의 감각을 담아내려 한 것이다.
뜨거움의 끝자락에서 서늘함이 스며들고, 그것이 곧 ‘끝’이 아니라 ‘익음’이라는 변화를 상징한다. 이는 자연의 순환이자 인간 존재의 진실이기도 하다.
삶에서의 ‘처서’란 언제 찾아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뒤, 더 이상 이기려 애쓰지 않고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일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한여름의 더위처럼 그치지 않을 것 같지만, 결국은 식고 잦아든다. 그리고 남는 것은 마음의 여유, 혹은 관조의 지혜다.
지나간 계절의 뒤안 길을 따라 그림자를 데리고 걸어 가노라면, 단지 계절의 변곡점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길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름의 기세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지만, 결국은 서늘한 가을의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그 길 위에서 얻는 것은 패배도 승리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무게를 인정하는 겸허함, 존재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받아들이는 지혜다.
그래서 처서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나간 뜨거움 위에 무엇을 남겼는가? 이제 다가오는 고요 속에서 무엇을 익혀낼 것인가?”
인생의 말복과 처서는 그렇게 찾아온다.
지나간 계절은 되돌릴 수 없지만, 그 계절이 남긴 흔적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열매가 된다.
더위가 끝나며 비로소 서늘함이 시작되듯, 고통이 잦아들며 비로소 평온이 피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삶의 길고 깊은 시정(詩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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