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아, 너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이었느냐 스쳐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오래전에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늘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모퉁이를 돌자, 문득 하얀 안개가 내려앉은 듯한 그 나무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늦봄의 햇살이 백옥(白玉) 같은 꽃송이를 통해 여리고 부드럽게 스며나와, 공기本身이 희고 투명한 빛으로 변하는 것만 같았다.
이팝나무,
그 이름만으로도 가난했던 시절의 그리움을 불러오는 이 나무는, 지금 이 자리에서는
오직 ‘아름다움’ 그 자체로 서 있었다.
꽃잎 하나 하나가 마치 정교한 한 점의 예술품처럼, 바람에 살짝 흔들릴 때마다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나는 그 빛에 이끌려, 마치 오래전에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늘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에는 어제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조금 전에야 떨어진 것인지 모를 하얀 꽃잎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은은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것은 달콤하면서도 싱그럽고, 어느새 스러져갈 것만 같아 애처로웠다.
이 향기는,
흩날리는 시간의 가루냄새가 아닐까.
나는 고개를 들어, 수많은 꽃들이 하늘을 향해 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과 흰 꽃의 대비는 너무나 선명해서, 마치 이 순간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왔다.
산들산들,
아주 잔잔하게,
하지만 결코 거스를 수 없이.
나뭇가지가 살짝 흔들리자,
꽃이 피어난 자리에서부터 하얀 꽃잎들이 하나, 둘, 그리고 수없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눈 내리는 풍경 같기도 하고, 별똥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같기도 했다.
바람을 타고 공중에서 춤을 추는 꽃잎들은,
각자 제 멋에 빠져 제 갈 길을 가는 듯했지만, 결국은 땅으로, 그 근원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라는 것은, 결국 이 꽃잎의 흩날림과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것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정작 그 흐름의 정체를 붙잡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꽃잎처럼 그 흔적은 분명히 남긴다.
내 얼굴에 생긴 주름살처럼,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옛 사진처럼,
그리고 지금 내 가슴을 스치는 이 아련한 감정처럼.
白花滿樹影 (백화만수영) :
흰 꽃 나무 그림자 가득한데
風裡問流年 (풍리문류년) :
바람 속에 흐르는 세월을 묻노라
花落無人覺 (화락무인각) :
꽃 지는 것 아는 이 없으나
惟留夢一痕 (유류몽일흔) :
오직 꿈 한 자국만을 남기네
이 시를 읊조리며,
나는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한다.
같은 한 해, 같은 하루, 같은 한 시간도, 그것을经历的(경력적) 시각에 따라 느끼는 ‘질량’이 다르다.
꽃밭에서 뛰노는 아이에게 한 시간은 짧은 순간이지만, 깊은 사랑에 이별을 고하는 이에게 한 시간은 영원처럼 길다.
시간은 결국 물리적인 양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새겨지는 ‘느낌의 깊이’가 아닐까. 우리는 시계의 침과 달력의 숫자에 쫓기며 살지만, 정작 자신의 내부에 쌓아온 시간의 두께에는 무심한 경우가 많다.
이팝나무는 해마다 꽃을 피운다.
그것은 변함없는 순환이다.
하지만 나무 자신도,
그 주변 환경도,
그 꽃을 바라보는 나도,
결코 ‘똑같은’ 상태로 그 순간을 맞이하지는 않는다.
나무는 한 해를 더 살며 그 몸통에 나이테를 하나 더 새기고, 땅은 비와 바람에 조금씩 모양을 바꾸며, 나는 지난해의 기억을 하나씩 짊어지고 서 있다.
순환 속에 있는 변화, 불변처럼 보이는 것 속에 스며있는 ‘변화’의 아이러니. 그것이 바로 시간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큰 수수께끼이자 가르침이다.
이팝나무 아래 서서
나는 시간의 맛을 본다
그것은 흰 꽃잎이 지는 달콤쌉쌀한 맛
과거는 발밑에 쌓인 꽃이 되고
미래는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
오직 현재만이
하늘과 땅을 잇는 흰 빛의 기둥
붙잡으려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지만
놓아버리는 순간
내 전부가 되어 스며드는 것
시간아,
너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이었느냐 스쳐가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이었느냐
우리는 흔히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모자라”, “시간이 흘러가버렸어”. 마치 시간이 우리 밖에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객체인 양 말이다.
하지만 이팝나무의 꽃잎이 보여주듯, 시간은 우리 ‘안’에서 피고 지는 것, 우리自身(자신)의 일부이다. 우리가 ‘시간을 낭비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실은 ‘자기 자신의 일부를 소중히 하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시간과의 화해는,
시계에 쫓기는 삶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머무는 데서 시작된다.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온전히 취하는 것,
비록 그것이 덧없이 스러져갈 미물(微物)의 아름다움임을 알면서도 그 순간의 감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아닌, ‘지금’이라는 시간을 최대한 충실하게 살아내는 일이다.
이팝나무의 꽃은 언젠가 모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푸르름의 여름을 지나, 단풍 들 가을을 맞이할 것이다. 그 순환은 끝없이 반복된다.
나도 그 순환의 고리 안에서, 나만의 꽃을 피우고 지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꽃이 얼마나 오래 피어있었는가가 아니라, 피어있을 때 그 빛과 향기를 누구보다 찬란하게 내뿜었는가일 터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수놓은 흰 꽃을 올려다본다. 바람이 다시 불어, 꽃잎들이 내려앉는다. 나는 두 손을 모아 그 중 한 장을 받아들었다.
손안에선 여전히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 꽃잎을 가만히 주머니에 넣었다.
이 덧없지만 아름다운 순간의 증거를,
내 시간의 한 조각을,
조용히 간직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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