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fford-upon-Avon (2)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고향을 찾다

by Alfius Historographus

Strafford-upon-Avon(2)


이제 앤은 셰익스피의 유년 시절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생가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King Edward VI School로 향했습니다. 공식 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으나 지역에 하나뿐이었던 문법학교에 시장까지 지낸 유력자 존 셰익스피어의 아들이 다니지 않았을 리가 없죠. 이 학교는 아직도 운영 중입니다. 시대를 뛰어넘은 듯한 창가의 장식품들이 매우 앙증맞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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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고전 및 역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 모든 작품이 한 사람의 것일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고, 심지어 셰익스피어가 누군가의 대필자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그가 어떻게 그렇게 심오한 작품들을 쓸 수 있었냐는 의혹이죠. 아직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야기들이지만 실상 뒷받침할 만한 정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럼 장갑 제조업자의 아들 윌리엄은 어디서 그러한 학식을 얻었을까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는 영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었습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과 그 아들 에드워드 6세의 교육개혁은 이전의 수도원과 교회 등에서 운영하던 전통적 교육 기관의 폐쇄와 새로운 문법학교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도 성십자가 길드(Holy Cross Guild) 학교 자리에 왕실의 후원을 받은 새로운 학교가 King's New School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지금은 King Edward VI School이라고 불리는 이 학교의 설립자 에드워드 6세는 매우 유명한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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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의 주인공이 바로 이 에드워드 6세입니다. 잠시나마 거지 생활을 했던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물론 사실은 아닙니다) 에드워드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교육에 매우 힘을 기울였지요.


학교의 문은 일반적으로 지역 상인, 상인, 관리의 아들들에게 열려 있었는데, 이들은 아이들의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재산과 지위를 가진 계층이었습니다. 학비는 무료였으나 여자 아이들의 입학은 허용되지 않았고, 극빈층 자녀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학교에 다니기 어려웠습니다.


학교 생활은 길고 엄격했습니다. 수업은 일요일을 제외한 주 6일간 여름에는 오전 6시, 겨울에는 오전 7시에 시작해서 오후 5시까지 이어졌고, 중간에 2시간 정도의 점심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수업은 라틴어로 진행되었고 학생들은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등 고전 작가들의 글을 외우고 번역하고 낭송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 영문학과의 로리 맥과이어 교수는 이러한 16세기 문법 학교의 교육과정은 미래의 극작가 양성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했다고 평가합니다. 고전을 읽고 대화와 토론을 이어가며 그에 필요한 수사학을 연마하는 것보다 극작가에게 더 좋은 수업은 없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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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해서 어린 윌리엄이 학교 생활을 즐겼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의 희곡 <좋으실 대로>에 등장하는 아침 등굣길에 징징거리며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는 어린 소년은 그의 어린 시절의 자화상이 아니었을까요?


"...the whining schoolboy, with his satchel, and shining morning face, creeping like snail unwillingly to school." <As You Like It>


그도 그럴 것이 튜더 시대의 학교는 매우 규율이 엄격하여 강도 높은 체벌이 일상적으로 행해졌고 동급생간의 괴롭힘도 일상 다반사였습니다. 우리의 가이드 앤은 윌리엄의 아버지가 높은 지위에 있었으므로 대신 매 맞는 소년(whipping boy)을 고용하였을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나 당시에 실제로 왕실이나 고위 귀족 이외에 이런 풍습이 만연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심지어 왕실의 기록조차도 분명하지 않은데 널리 알려져 있는 에드워드 6세와 매 맞는 소년의 일화 역시 마트 트웨인의 소설 내용에 기인한 것입니다.


학교를 좋아했든 그렇지 않았든, 윌리엄은 학업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13세가 되던 1577년경,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의 사업과 사회적 지위는 큰 어려움에 처했고 그러한 상황에서 장남인 윌리엄이 한가롭게 학교에 다니기는 어려웠을 듯합니다.


존은 불법 대부업과 무허가 양모 거래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고, 쌓여가는 부채와 여러 차례의 소송에 시달렸습니다. 이 시기에는 벌금의 일부를 받고 법률 위반 사항을 폭로하는 전문 고발자들이 점점 늘었는데 존은 이들의 표적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재산과 평판을 모두 잃은 존은 결국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지역 사회에서 쌓아 온 지위와 영향력을 모두 잃었습니다.


존의 사업이 갑자기 기울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그중 주목할 만한 가설은 그가 비밀리에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 때문에 일종의 박해를 받았다는 것이지요. 이를 뒷받침할 만한 단서를 학교에 바로 붙어 있는 길드 채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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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위에서 잠시 언급한 도시의 종교 길드인 성십자가 길드의 채플이며 설립 연대는 13세기입니다. 설립자 로버트 드 스트라포드(Robert de Stratford)가 아직도 스테인드글라스 창에서 당당히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네요. 그 왼편의 인물은 15세기에 예배당 내부와 탑 부분의 확장 공사를 위해 큰 액수를 기부한 휴 클롭턴(Hugh Clopton), 오른편은 에드워드 6세입니다. 왕의 옆, 오른쪽 끝의 인물이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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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배당의 벽에는 아직도 15세기말 제작된 중세 벽화가 남아 있는데, 이는 유럽에서도 보기 드문 귀중한 유산입니다. '최후의 심판', '죽음의 우화', '성인과 악마의 대결'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이 벽화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앙과 도덕의 가치, 그리고 죽음에 대한 경고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어린 윌리엄 셰익스피어 역시 이 벽화들을 보며 상상력을 키웠을 것이고, 이는 <맥베스>의 황야의 마녀들과 <햄릿>의 성벽의 유령을 떠올리게 하는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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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길드 채플은 지역 시민의 신앙과 공동체 의식의 중심지였으며, 종종 학생들이 연극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셰익스피어 역시 이곳에서 첫 무대 경험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생들이 공연하는 희곡을 직접 썼을 수도 있지요. 학생들이 직접 극본을 쓰고 공연하는 오랜 전통은 오늘날에도 영국의 여러 학교들에 남아 전해집니다.


종교 개혁 시기에 존은 이 벽화들을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완전히 훼손하는 대신 석회로 덮어 가렸고 덕분에 벽화가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졌습니다. 당시의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으나 지엄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렇듯 대담하게 행동한 이유는 그가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꽤 유력합니다.


아무튼 집안의 몰락과 함께 윌리엄의 학업은 끝이 났고 이후 런던에서 그를 다시 만날 때까지의 행적은 추측이 난무할 뿐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도 학교를 떠날 때가 되었군요.(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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