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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무게, 사람의 시간

2025년 10월 20일 ~ 10월 26일 주간기록

by 기록하는노동자

신뢰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회사에 임금교섭을 위임한 뒤, 노동조합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싸움의 무게는 잠시 내려놓았지만, 그 대신 ‘책임’과 ‘기록’이라는 또 다른 무게가 어깨 위에 얹혔다.


텀블벅 출판 프로젝트의 원고를 다듬으며 지난 시간을 다시 마주했고
화학연맹 체육대회에서는 따뜻한 연대의 손을 느꼈다.
그리고 주말에는 오랜만에 가족들과 여행을 떠났다.


기록과 대화, 연대와 가족.
이 네 가지의 온도가 교차한 한 주였다.


싸움은 잠시 멈췄지만, 버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10월 20일, 기록의 무게와 신뢰의 걱정

지난주 회사에 임금교섭을 위임하면서

노동조합 운영을 어떻게 정상화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요즘 주말마다 조합 차량 대여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방의 조합원들이 이용하기에는 여전히 제약이 많다.
재정이 더 넉넉하다면 쏘카 같은 렌터카 지원도 해주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2025년도 이제 두 달 남짓.
회사의 법적 분쟁은 3건 모두 고등법원에 계류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화의 물꼬가 트인 지금
신뢰를 쌓아간다면 소송도 자연스럽게 정리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오후에는 텀블벅 출판 프로젝트의 최종 원고를 다시 읽었다.
이상하게 문장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수정하는 동안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고
그때의 감정과 지금의 생각 사이의 간극이 뚜렷했다.


“그때 이만큼만 알았더라면,
이렇게 비싼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됐을까?”
아니면 지금의 고난이 그때의 무지를 채우기 위한 예정된 과정이었을까?


노사관계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과거를 정확히 기록하고

그 기억 위에 더 나은 선택을 쌓기 위해 나는 글을 쓴다.


요즘 회사와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
이 시점에 책을 내는 것이 혹여 걸림돌이 되진 않을까 걱정도 된다.
그러나 기록하지 않으면 또 잊힌다.
잊히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된다.
그렇기에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나는 이 기록을 남긴다.
그것이 후원자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예의다.

10월 21일, 작은 보답, 큰 감사

화학연맹 체육대회가 내일부터 열린다.
텀블벅 프로젝트와 모금 과정에서
십시일반 도움을 준 동지들에게 작게나마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코스트코를 열 번은 돈 것 같다.
고민 끝에 과일을 고르기로 했다.
결국 지역본부별로 귤 스무 박스를 구매해 차에 실었다.


지난 7월 29일 사무실 개소식 때 받은 투쟁후원금
그리고 텀블벅 진행 중 내민 수많은 연대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 마음이 지금의 노동조합을 지탱하고 있다.


이 정성을 노동조합이 존속하는 한 기억되게 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여유가 없지만 앞으로 재정이 안정되면
‘투쟁기금’과 ‘연대기금’을 적립하는 안건을 다음 대의원대회에 상정할 생각이다.


언젠가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이 경험이 신설노조들에게 좋은 교본이 되길 바란다.

10월 22일 ~ 10월 23일, 다시 만난 동지

이번 화학연맹 체육대회는 가평에서 열렸다.

노동조합이 처음 만들어진 2022년에는 아직 연맹에 가입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2023년 해고 직후 처음 참가한 경주 대회에서는
어색하고 낯선 마음을 연맹 대표자들이 가족처럼 감싸주었다.
무대에서 “서울지역본부에 가장 늦게 가입한 노조”라며
지역본부 대표로 장기자랑에 나가서 노래까지 불렀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체육대회는
부당해고로 입은 상처에 덮어준 붕대 같은 시간이었다.


2024년 시흥 대회에서는
부당해고자 신분으로 연맹 사무처를 도우며
사진을 찍고 영상을 편집했다.
즐겁긴 했지만, 그때도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2025년 올해는 달랐다.
사무국장님과 함께 근로시간면제를 사용해
정식으로 참가한 첫 체육대회였다.
복직은 아직 멀지만,

‘단체협약이 있는 노동조합’으로 함께 섰다는 점에서
감회가 남달랐다.


역시나 동지들은 따뜻했다.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제 여기까지 왔다”고 격려해주었다.


그 말이 참 오래 남는다.
“이제 여기까지 왔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10월 23일 ~ 10월 26일, 가족여행, 또 다른 버팀의 시간

설 연휴 때 약속했던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아버지, 어머니, 형님 가족, 그리고 우리 가족.
아홉 명이 움직이니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부모님이 물으셨다.
“요즘 회사는 좀 괜찮냐?”
여전히 부당해고 사실을 모르는 부모님께
나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
“노조도 잘 돌아가고 있고
회사는 요즘 힘들지만 곧 좋아질 거예요.”


그 말이 목에 걸렸다.
솔직히 말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참 초라하게 느껴졌다.


즐거워야 할 여행이었지만
내내 마음 한켠이 무겁고 불안했다.
그래도 가족의 웃음 속에서 조금은 위로받았다.


삶은 이렇게
진실과 회피

버팀과 휴식이 뒤섞인 채
묘하게 흘러간다.



싸움은 잠시 멈췄지만 마음은 여전히 긴장 위에 서 있다.

회사와의 대화, 동지와의 연대, 가족과의 시간.
그 셋은 서로 다른 이름의 버팀목이다.


이번 주의 기록은 ‘투쟁’이 아니라 ‘존재’의 기록이다.

여전히 싸움은 끝나지 않았지만 나는 오늘도 살아내고 있다.

출근대신기록하는노동자의주간일지12-1.jpg 제41회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 체육대회 현장
출근대신기록하는노동자의주간일지12-2.jpg 제41회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 체육대회 현장


이 기록은 노동존중사회를 위한 노동자의 기록이며, 모든 연대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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