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될 수 있다는 신체에 대한 믿음

by Snuff

초등학교때, 우리는 선생님에 의해 앉는 자세를 바꿔야 했고 아빠 다리 자세를 배웠다. 일제 시대의 정신이다. 신체를 통제하면 우리의 생각까지 통제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한 비판으로; 말해왔던 것들이나 말해졌던 것들, 그리고 말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 문제의 방향성과 구조에 비판을 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비판은 비판이 아닌 항상 문제의 구조를 완결시키는 방향으로 간다. 가령 촉법소년에 대한 문제는 법적인 '나이'를 근거로 법적인 책임을 재규정하는 것으로, 동덕여대 시위에 대한 것들도 금전적인 책임을 근거로.


우리들은 이미 구조화된 해결방법으로 적용시키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떻게?


문제는, 문제의 출발은, 문제에 대한 나의 의식은 규범적인 도덕적 태도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 윤리적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촉법소년 문제를 청소년의 나이를 재규정함으로써 해결하려는 생각들과 동덕여대 사건을 남성혐오에 대한 시선이나 외부의 개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우리가 청소년과 갓 스무 살이 된 무리들을 어른의 책임으로 묻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우리의 시선은 우리의 도덕들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윤리적 태도에 대해서 전혀 사고하고 있지 않아서이며, 사고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일종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삶의 의미? 지금 나는 일을 하기 싫은데, 일을 해야 되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당장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혹은 이 일이 나한테 맞는가? 내가 이 일을 십 년 이십 년 동안 계속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그러면 이 일이 아니면 무슨 일을 해야 될까?


만약 우리가 이런 생각들을 한다면 우리는 농노제의 농노들과 다름없다. 다만 신이 없는 사회의 농민이다.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신이 없는 사회의 농민들의 삶을?


우리들의 문제들은 당연하다. 촉법소년의 문제는 그들의 가정환경과 그들의 무리와 학교에서의 성적, 그들의 배경이 이미 입증을 하기 때문에 청소년의 문제를 사회 시스템에 전가한다.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에 대해서 적응하라고 강제하는 것만큼 쉬운 답변이 어디 있는가? 우리에게는 아직 계몽이 익숙하다. 도파민 때문에 핸드폰 하느라 밤에 잠을 못 잔다면, 우리는 우리를 계몽하면 된다!


우리가 만약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면, 핸드폰 하느라 잠을 자지 못할까? 우리를 어떻게 계몽시켜야 될지에 대해서 생각이나 할까?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똑같은 말만 반복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믿음이라는 것도 부끄럽게 여겨지는 세상이다. 근육질 신체도 돈도 벌어주지 못해서.


그렇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의미이며 자신의 윤리적 태도임을 명시하도록 하자.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는 행위 만으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을 명시하자. 아무런 효력이 없다. 삶에 아무런 효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