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질병이다

<병신과 머저리>, <밀양>, 마틴 맥도나

by Snuff


"나는 타인의 고통을 연기하고, 기록하고, 감상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나의 병은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는가, 아니면 느끼는 척하는 데 있는가. 예술가의 윤리란, 바로 이 경계를 자각하는 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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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벌의 라스콜니코프로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나는 도끼로 노파의 머리를 깨부순 라스콜니코프다. 나는 평범한 대학원생을 연기해야 했다. 그래서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가 나보고 문제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란다. 그렇다면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사이코패스를 연기해야 했다. 그래서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가 나보고 사이코패스란다. 나는 사이코패스를 연기했을 뿐이었다. 의사는 30년 동안 이 사람 저 사람이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를 진단했다. 나는 사이코패스를 연기했을 뿐이었다. 나보고 사이코패스란다. 그렇다면 나는 사이코패스다.


간단하다.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병의 증거는 없다. 사실 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 적도 없다. 문제는 내가 책을 읽고 사이코패스라고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로 시작해서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를 거치고, 마틴 멕도나의 영화로 끝날 예정이다.



1. <병신과 머저리>

동생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동생은 혜인의 청첩장을 받았다. 형의 소개로 동생의 화실에 나왔었던 혜인은 가난한 동생을 버리고 의사를 선택했던 것이었다. 동생은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다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6.25를 겪은 형. 형의 직업은 의사로서, 수술하다가 소녀가 죽어버렸다. 형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죄책감을 안은 채로 처음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쓴 자신의 소설을 서랍에 박아 넣어버린다.

동생은 형의 소설을 훔쳐보기 시작한다. 소설의 시기는 6.25. 이야기는 전쟁 속의 낙오자 세 명. 자신, 김일병, 그리고 오관모. 김일병은 오관모에게 학대당한다. 오관모에게 겁탈당한다. 자신은 사슴하나 못 죽이는 참새가슴으로 그 끔찍한 광경을 어찌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기만 한다. 다만 이 이야기가 픽션이 아닌 형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동생은 형의 이야기를 기대한다. 형은 소설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런데도 형은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동생은 왜인지 분노한다. 동생은 형의 원고를 훔쳐서 자신이 결말짓는다. 참새가슴인 자신이 아픈 김 일병을 편히 죽이는 것으로. 동생은 속이 후련해졌다. 형과 같이 일상생활을 제대로 못하던 동생도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형은 동생이 쓴 부분을 잘라내고, 오관모가 김일병을 죽이고, 자신이 오관모를 죽이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다.

어느 날 밤, 형은 혜인의 결혼식장에 다녀왔다. 그리고 술에 잔뜩 취해있다. 형은 동생을 부른다. 동생이 나오자, 형은 자신의 소설을 불구덩이 속에 태우고 있었다.


"병신 새끼, 너의 그 귀여운 아가씨는 정말로 너를 싫어했냐? 병신 새끼! 그래서 도망간 그 아가씨의 얼굴을 그리고 싶어 했구나!"


형은 동생이 소설 속의 불쌍한 김 일병을 죽인 것을 쏘아붙이곤, 혜인이 동생을 떠난 이유를 알 것 같다며.


"인마, 넌 머저리 병신이다, 알겠냐?"


혜인의 남편은 형이 군대에서 알게 된 지인이다. 그리고 식장에서 오관모를 만났다. 죽인 줄 알고 있었던 오관모가 살아서 식장에 온 것이다. 형은 식장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 새끼가 살아있는데, 뭔 소용이랴. 형은 소설을 불태운다.


"이 참새가슴아, 뭘 듣고 있어! 썩 네 굴로 꺼져!"



동생은 화실로 꺼진다.



형은 아픔 속에서 이를 물고 살아왔고, 그 아픔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고 있었다. 형은 그 아픔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형이 그 아픔을 벗어던지려는 순간,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오관모가 찾아왔던 것이다. 형은 자기 질병의 원인을 알고, 동생은 자기 질병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아픔은 어디서 온 것일까. 혜인의 말대로 형은 6.25의 전상자이지만, 아픔만이 있고 그 아픔이 오는 곳이 없는 나의 환부는 어디인가. 혜인은 아픔이 오는 곳이 없으면 아픔도 없어야 할 것처럼 말했지만, 그렇다면 지금 나는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것인가.
나의 일은, 그 나의 화폭은 깨진 거울처럼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것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까지 보다 더 많은 시간을 망설이며 허비해야 할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힘으로는 영영 찾아내지 못하고 말 얼굴일지도 몰랐다. 나의 아픔 가운데에는 형에게서처럼 명료한 얼굴이 없었다.


작가로서 직업윤리까지 갖춘 명예로운 GOAT 작가 이청준. 나는 <병신과 머저리>를 읽고 다음날, <벌레이야기>를 구입했다. <병신과 머저리>는 66년도 작품이다. 이 사람은 70년대를 거쳐 85년에, 이창동 <밀양>의 원작 <벌레이야기>를 썼다. 나는 <벌레이야기>를 처음 보고 너무 실망했다. 풍경 묘사, 인물의 묘사, 공간의 묘사가 전부 절단됐다. 등장인물의 말 만 듣는다. 나는 이딴 걸 기대하지 않았다.

난 이 두 작품 만을 봤다. 단 두 작품만 보고, 이딴 식으로 휘갈기는 필자의 태도에 감탄하지만, 나는 연구자도 평론가의 책임도 없으니 말을 계속하겠다.

일단, 우리의 훌륭한 이창동 감독님은 이청준 작가님의 <벌레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셨을까나?부터 알아가 보자.



2. <밀양>, 이창동

이창동 감독은 포르노그래피의 화신이다. <밀양>, 전도연이라는 신급 프로 연기자의 테이크는 수십 번. 이창동 감독은 그런 전도연에게 연기하지 마쇼! 그냥 느끼쇼! 자, 연기하지 않고, 느낄 때까지 테이크! 전도연은 당연히 기가 차겠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그게 그렇게까지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창동 감독님은 자신의 영화의 윤리에 대해서. 자신의 끔찍한 태도에 괴로워하시는 분이다. 앞으로 자신이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영화를 찍는 자신의 태도에 누구보다 책임감을 가지고 괴로워하는 분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찍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이창동 감독의 태도다.

영화는 재현의 문제와 담론의 발화 문제에 대해서 장르로 회피할 수 있다. 션 베이커 감독은 <아노라>에서 성노동자라는 문제를 그렇게 회피해 버렸다. "그냥 웃고 넘겨버리자~ 이건 픽션이니까~" 물론 션 베이커 감독의 태도를 살짝 비꼬았지만, 필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션 베이커 감독은 <아노라>의 아노라를 사랑한다. 분명 다르다. 사랑할 수 있어서,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픔에 동정하는 것과 그 아픔을 공유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아픔을 가진 생명체를 사랑하는 것은 각기 다르다.

이창동 감독은 작품마다 그 태도가 다르지만, 밀양에서 전도연이 연기하는 이신애가 아닌, 인간 이신애를 보고 싶으셨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포르노그래피다. 밀양은 포르노그래피다. 관객인 나는 이신애가 아이를 잃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눈이 쏙 빠지듯이 관찰했고, 모든 관객도 그럴 것이다. 현실에서도 그런 광경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그 광경을 잊을 수 없게 되겠지. 매우 영화적인데? 와!


반면에 왕빙이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태도를 들어보자. 이 사람은 인터뷰이가 눈물을 흘리면 카메라를 끈다고 한다. 왜? 간단하다.


"나는 정치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지 않는다."

- 왕빙


뭔 소리여?

쉽게 말해서,


스크린샷 2025-10-12 14.51.02.png 유니세프

이게 자본주의고,


스크린샷 2025-10-12 14.51.33.png 유니세프 비꼬기

이게 파시즘이고,


https://www.youtube.com/watch?v=DYbt8rmJT40

메이플 스토리 김창섭 디렉터의 권력을 밑바닥으로.

“파시즘은 대중에게 그들의 권리를 주지 않고, 그 대신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준다. 대중은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를 바꿀 권리를 갖고 있지만, 파시즘은 그것을 보존하면서 그 대신 대중에게 표현의 기회를 준다. 파시즘의 논리적 귀결은 정치의 미학화이다. ... 공산주의의 대답은 예술의 정치화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유니세프의 예시는 아주 훌륭한 공산주의 정치 방식이다. 목적이 돈이냐, 정치냐에 따라서 공산주의 혹은 자본주의의 방식이 된다. 왕빙 감독은 저런 걸 안 하겠다는 것이다. 오직 아카이브의 역할. 카메라 앞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권력이 작동한다. 빌딩 옥상에서 누가 뛰어내리려고 한다. 빌딩 밑에서 사람들이 카메라를 쳐들고 녹화를 한다. 뛰어내릴 용기는 없고, 한 바탕 생쇼라도 해보려고 했던 중년 회사원은 좆됐다. 픽션이든 다큐멘터리든, 권력이 작동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인데 중국에서 개봉하지 못한다.


자 다시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돌아가보자, 이창동 감독님은 본인의 영화를 찍으면서 아카이브인지 픽션인지 뭔지 모를 카메라에게 고통받는다. 재현의 문제다. 이청준 작가님의 <벌레이야기> 형식은 작가로서의 재현의 문제에 열심히 고민하고 완성한 '실험' 형식이다. 모든 묘사의 제거, 오직 이야기의 발화자만이 소설을 전개한다. 이청준 작가님은 작가의 윤리 의식에서 자신의 태도를 완성시킨 것일까? 아니면 회피한 것일까? 읽어보면 느껴질 것이다.



3. 마틴 맥도나의 영화

“겸손? 나는 겸손함이 싫습니다. 잘났다면 그렇지 않은 척 하지는 말아야죠. 무하마드 알리처럼 자신이 가장 위대한 존재라 말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증명하면 됩니다."

- 21세기의 세익스피어(라고 불리는) 마틴 맥도나


영국의 쿠엔틴 타란티노라고 불리는 천재. 마틴 맥도나. 필자의 모토다. 타란티노의 담론은 소재지만, 맥도나의 소재는 관객 또한 고민하게 만든다. 다른 영화들도 훌륭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1. <필로우맨>(희곡)

주인공인 형이 갑자기 경찰에게 붙잡혀서 취조당한다. 형이 동생을 위해 쓴 잔혹 동화의 모방 범죄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형은 동생을 위해 필로우로 부모를 질식시켜 살해했고, 동생은 형의 이야기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정말 말이 되는지 실험했다. 그리고 이 동화책들을 불태울 건지 말건지. 그리고 이 동화 작가를 처형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2. <세븐사이코패스>

주인공은 할리우드 작가인데 소재가 없어서 힘들다. 주인공의 절친이 사이코패스를 소재로 글을 써보자고 한다. 절친은 미친 사이코패스 살인마고, 자신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마지막, 이 미친 사이코패스는 매우 영화적인 총격전을 기대하고, 주인공에게 똑띠보고 글을 쓰라고 하지만 주인공은 도망친다. 이 미친 사이코패스가 기대한 총격전은 나오지 않고, 자살 아닌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주인공은 <세븐사이코패스>라는 영화를 완성시키고 죄책감에 안겨서 살아간다.


이 두 개가 필자가 얘기할 수 있는 마틴 맥도나라는 사람의 태도다. 부모님은 아일랜드에서 일하러 온 노동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신사가 되지 못하는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두 국적. 이 사람이 영국 기사 작위를 받으면 너무 시네마틱 할 텐데.


어쨌든 마틴 맥도나 감독의 사례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필자가 질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 간 적도 없다.


"나는 타인의 고통을 연기하고, 기록하고, 감상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나의 병은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는가, 아니면 느끼는 척하는 데 있는가. 예술가의 윤리란, 바로 이 경계를 자각하는 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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